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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희의 고백 (Kim Hyun-hee's confession), 나의 어린시절, 세 번째-3

나의 어린시절, 세 번째-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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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어린시절, 세 번째

평양으로 돌아가기 위해 모스끄바 주재 북조선 대사관에서 머물러 있을 때, 한 가지 고통스러운 것은 갑자기 바뀐 식사내용이였다.

모스끄바 주재 대사관 숙소에서 무우국에 밥이 나왔는데 입이 고급이 되어버린 나는 그것을 전혀 먹을 수가 없었다. 배는 고픈데 식사는 도무지 못 먹겠고 꾸바에서 먹던 음식이 자꾸만 생각났다.

(엄마)“먹어야만 된다. 이젠 이런 음식을 먹고 살아야 돼.”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식사에 적응하기까지는 상당히 긴 시간이 걸렸다.

어머니는 며칠을 나다니면서 털외투를 비롯한 의류와, 냄비 같은 식기를 많이 사들였다. 이것들은 후에 조국에 돌아와서 큰 살림밑천이 되였다. 모스끄바에서 사온 그릇은 20년이 지나 내가 평양을 떠날 때까지 쓰고 있었다.

모스끄바에서 며칠을 보낸 우리 식구들은 다시 비행기를 타고 북경으로 갔다. 북경에서도 역시 중국 주재 대사관 숙소에서 머물렀다. 북경에서는 국제 렬차 침대칸을 타고 평양으로 떠났다.

잠버릇이 나쁜 나는 2층 침대에서 자다가 밑으로 떨어져 어머니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렬차 려행은 비행기보다 몇 배나 지루하고 고달팠고 동생들은 어머니를 보채고 칭얼거렸다. 특히 젖먹이인 현수는 계속 기저귀를 버려놓아 빨래감을 처리하느라고 진땀을 뺐다. 어머니가 기저귀를 빨기 위해 기차 내 화장실로 가면 나는 어머니를 따라가서 수도꼭지를 누르고 있어야 했다. 그 수도는 꼭지를 누르고 잠시 쓸 수 있도록 되어있어 계속 누르고 있지 않으면 기저귀를 빨 만큼 물이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키가 작아서 수도꼭지에 거의 매달려야 하니 팔이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아팠다.

“아직 머런?” “또 기저귀 빨아야 해?”

나는 자꾸만 기저귀를 버려내는 현수가 얄미운 생각도 들었다.

우리가 탄 기차는 중국 대륙을 지나 압록강 철교를 앞두고 어느 역에서 멈추었다. 여기에서 승객들은 모두 기차에서 내려 검역소에서 간단한 신체검사를 받았다. 어떤 검역원이 내 무릎을 망치로 두드려보고 관절염이라며 나에게 다리가 아프지 않느냐고 물었다.

“아니요, 아프지 않아요.”

내가 고개를 흔들자 그 검역원은 약간 기분 상한 표정으로 관절염 증세가 틀림없다고 일러주었다. 엄마와 나는 멀쩡한 다리를 아프지 않느냐고 묻는 그를 이상스럽게 쳐다보았다.

기차가 종착역인 평양에 도착하자 아버지 직장 사람들이 차를 가지고 마중 나와 있었다. 우리 식구는 그들이 안내하는 대로 따랐다. 새로 배정받은 서성구역 하신동 외교부 아빠트 5층 22호가 우리가 살 집이였다. 꾸바의 집과 비교해 보면서 나는 ‘참 작다' 하고 생각했다. 새로 도배도 하고 옷장도 손질을 해야 하는데 아버지가 없었기 때문에 며칠 동안 개성에서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와서 도와주었다. 어머니는 꾸바에서 부친 이사짐을 찾느라고 몇 주일을 평양역에 나가 살았고 거주 수속을 하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여다녔다. (불만) 나는 또 ‘애보기' 담당이였다. 어머니는 아이들만 남겨 놓고 나갈 수가 없어서 아래층 아주머니에게 우리를 부탁하였으나 갓난아이 현수는 내 등에서 떠나지 않았다. 하루 종일 천리마띠로 현수를 업고 엄마가 돌아오기를 눈이 빠져라 기다렸다. 엄마를 기다리다가 혹시 5층 우리 집에 엄마가 돌아와 있는게 아닌가 해서 급히 5층까지 올라가 잠겨 진 문을 확인하고 다시 내려오기를 몇 번씩 되풀이했다. 나중에는 오르내릴 힘도 없어 현수를 업은 채 주저앉아 버렸다.

그 당시 내 어깨는 현수의 몸무게에 못 이겨 물집 투성이였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


나의 어린시절, 세 번째-3 Meine Kindheit, Dritte - 3 My Childhood, Third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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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어린시절, 세 번째

평양으로 돌아가기 위해 모스끄바 주재 북조선 대사관에서 머물러 있을 때, 한 가지 고통스러운 것은 갑자기 바뀐 식사내용이였다. When staying at the North Korean Embassy in Mosqueva to return to Pyongyang, one painful thing was the sudden change of meal. 平壌に戻るためにモスクワの駐北朝鮮大使館に滞在していたとき、一つだけ苦痛だったのは、突然変わった食事内容だった。

모스끄바 주재 대사관 숙소에서 무우국에 밥이 나왔는데 입이 고급이 되어버린 나는 그것을 전혀 먹을 수가 없었다. Rice was served with radish soup at the dormitory of the embassy in Moscow, but I couldn't eat it at all because my mouth became high-quality. モスクワ駐在大使館の宿舎で大根のスープにご飯が出たのですが、口が肥えてしまった私は全く食べられませんでした。 배는 고픈데 식사는 도무지 못 먹겠고 꾸바에서 먹던 음식이 자꾸만 생각났다. I was hungry, but I couldn't eat at all, and I kept thinking about the food I ate in Cuba. お腹は空いているのに、食事はどうしても食べられず、クバで食べたものがどんどん思い出されました。

(엄마)“먹어야만 된다. (Mom) “I have to eat. (お母さん)「食べないといけない。 이젠 이런 음식을 먹고 살아야 돼.” Now I have to eat this kind of food.” これからはこんなものを食べて生きていかなければならない。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I didn't know what my mother meant. 母の言葉が何を意味しているのか、私にはわからなかった。 식사에 적응하기까지는 상당히 긴 시간이 걸렸다. It took quite a while to get used to eating. 食事に慣れるまでかなり時間がかかりました。

어머니는 며칠을 나다니면서 털외투를 비롯한 의류와, 냄비 같은 식기를 많이 사들였다. My mother went out for a few days and bought a lot of clothes, including fur coats, and tableware such as pots. 母は何日も出かけて、毛皮のコートをはじめとする衣類や、鍋などの食器をたくさん買った。 이것들은 후에 조국에 돌아와서 큰 살림밑천이 되였다. These later returned to their homeland and became a great household cloth. これらは後に祖国に戻り、大きな生活基盤となった。 모스끄바에서 사온 그릇은 20년이 지나 내가 평양을 떠날 때까지 쓰고 있었다. The vessel I bought from Moscow was used until I left Pyongyang 20 years later. モスクワで買った器は20年後、私が平壌を離れるまで使っていた。

모스끄바에서 며칠을 보낸 우리 식구들은 다시 비행기를 타고 북경으로 갔다. After spending a few days in Moscow, my family flew back to Beijing. モスクワで数日過ごした私たち家族は、再び飛行機に乗って北京に向かった。 북경에서도 역시 중국 주재 대사관 숙소에서 머물렀다. In Beijing, he also stayed at the residence of the Chinese embassy. 북경에서는 국제 렬차 침대칸을 타고 평양으로 떠났다. In Beijing, he traveled to Pyongyang in an international train bed. 北京では国際列車の寝台車に乗って平壌に向かった。

잠버릇이 나쁜 나는 2층 침대에서 자다가 밑으로 떨어져 어머니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I had a bad habit of sleeping, and I fell asleep on the bunk bed and surprised my mother. 寝相が悪い私は2段ベッドで寝ているときに下に落ちて母を驚かせたこともありました。 렬차 려행은 비행기보다 몇 배나 지루하고 고달팠고 동생들은 어머니를 보채고 칭얼거렸다. The trip was several times as boring and painful as the airplane, and the younger brothers cried and shouted at their mother. 列車の旅は飛行機の何倍も退屈で辛く、弟たちは母親に泣き言を言って泣き叫びました。 특히 젖먹이인 현수는 계속 기저귀를 버려놓아 빨래감을 처리하느라고 진땀을 뺐다. In particular, Hyunsu, a suckling child, struggled to handle the laundry by discarding the diaper. 特に授乳中のヒョンスは、おむつを捨て続けるので、洗濯物を処理するのに苦労した。 어머니가 기저귀를 빨기 위해 기차 내 화장실로 가면 나는 어머니를 따라가서 수도꼭지를 누르고 있어야 했다. When my mother went to the toilet in the train to suck my diapers, I had to follow her and hold the faucet. 母がおむつを洗うために電車内のトイレに行くと、私は母を追いかけて蛇口を押さえてい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 그 수도는 꼭지를 누르고 잠시 쓸 수 있도록 되어있어 계속 누르고 있지 않으면 기저귀를 빨 만큼 물이 나오지 않았다. The tap was designed to tap the tap for a while, so the water didn't come out enough to suck the diaper unless it was kept pressed. その水道は蛇口を押してしばらく使えるようになっていて、ずっと押していないとおむつを洗うほどの水が出なかった。 게다가 키가 작아서 수도꼭지에 거의 매달려야 하니 팔이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아팠다. In addition, I was short and almost hung on the faucet, so it hurts like my arm fell off. しかも背が低いので、蛇口にほとんどぶら下がらないといけないので、腕が抜けるように痛かった。

“아직 머런?”  “또 기저귀 빨아야 해?” "Murren yet?" "まだマーレン?" "またおむつ洗うの?"

나는 자꾸만 기저귀를 버려내는 현수가 얄미운 생각도 들었다. I kept thinking that Suspender, who keeps throwing diapers down, was ugly. 私は、どんどんおむつを捨てるヒョンスが憎たらしいとも思った。

우리가 탄 기차는 중국 대륙을 지나 압록강 철교를 앞두고 어느 역에서 멈추었다. The train we boarded stopped at a station ahead of the Yalu River Bridge across China. 私たちが乗った列車は中国大陸を通り過ぎ、鴨緑江の鉄橋の手前のある駅で止まった。 여기에서 승객들은 모두 기차에서 내려 검역소에서 간단한 신체검사를 받았다. Here, all the passengers got off the train and underwent a brief physical examination at the quarantine station. ここで乗客は全員列車を降り、検疫所で簡単な身体検査を受けました。 어떤 검역원이 내 무릎을 망치로 두드려보고 관절염이라며 나에게 다리가 아프지 않느냐고 물었다. A quarantine pattered my knee with a hammer and asked me if it was a pain in my leg. ある検疫官が私の膝をハンマーで叩いて、関節炎だと言って、私に足が痛くないかと尋ねました。

“아니요, 아프지 않아요.”

내가 고개를 흔들자 그 검역원은 약간 기분 상한 표정으로 관절염 증세가 틀림없다고 일러주었다. When I shook my head, the quarantine told me that he had some symptoms of arthritis. 私が首を横に振ると、その検疫官は少し不機嫌そうな顔で、関節炎の症状に違いないと教えてくれました。 엄마와 나는 멀쩡한 다리를 아프지 않느냐고 묻는 그를 이상스럽게 쳐다보았다. My mom and I looked at him strangely asking if he had a healthy leg. 母と私は、健常者の足を痛くないかと尋ねる彼を不思議そうに見ていた。

기차가 종착역인 평양에 도착하자 아버지 직장 사람들이 차를 가지고 마중 나와 있었다. When the train arrived in Pyongyang, the terminal station, people at his father's office picked up the car. 列車が終点の平壌に到着すると、父の職場の人たちが車を持って迎えに来ていた。 우리 식구는 그들이 안내하는 대로 따랐다. Our family followed their directions. 私たち家族は彼らの案内に従いました。 새로 배정받은 서성구역 하신동 외교부 아빠트 5층 22호가 우리가 살 집이였다. The newly allocated house, Hanseong-dong, Seoseong-gu, Foreign Affairs Department, 5F 22, was our home. 新しく割り当てられた西城区(ソソン地区)ハシドン洞(ハシドン洞)の外交部アパート5階22号が私たちが住む家でした。 꾸바의 집과 비교해 보면서 나는 ‘참 작다' 하고 생각했다. Compared to the house of Cuba, I thought it was 'small'. クバの家と比較して、私は「本当に小さいな」と思った。 새로 도배도 하고 옷장도 손질을 해야 하는데 아버지가 없었기 때문에 며칠 동안 개성에서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와서 도와주었다. I had to do new painting and clean the closet, but my father was not there, so for a few days, my maternal grandfather and grandmother came to help me from Gaeseong. 新しく壁紙を貼ったり、クローゼットも手入れ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が、父がいなかったので、数日間、開城から母方の祖父と祖母が来て手伝ってくれました。 어머니는 꾸바에서 부친 이사짐을 찾느라고 몇 주일을 평양역에 나가 살았고 거주 수속을 하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여다녔다. My mother went to Pyongyang Station for a few weeks to find her father's moving in Cuba, and ran and ran to and fro to complete the residency procedure. 母はクバから父親の引越しの荷物を探すために数週間を平壌駅で過ごし、居住手続きをするためにあちこちを走り回った。 (불만) 나는 또 ‘애보기' 담당이였다. (Complaint) I was also in charge of 'child care'. (不満)私はまた「子守り」担当だった。 어머니는 아이들만 남겨 놓고 나갈 수가 없어서 아래층 아주머니에게 우리를 부탁하였으나 갓난아이 현수는 내 등에서 떠나지 않았다. My mother asked us to go downstairs because she couldn't leave her children alone, but she did not leave her back. 母親は子供だけ残して出かけることができず、下の階のおばさんにお願いして私たちを連れて行ってもらったが、生まれたばかりのヒョンスは私の背中から離れない。 하루 종일 천리마띠로 현수를 업고 엄마가 돌아오기를 눈이 빠져라 기다렸다. Suddenly, I waited for the snow to come back to my mother after hanging out with a chun-ri mat all day long. 一日中、千里眼で懸垂を担いでお母さんが帰ってくるのをじっと待っていた。 엄마를 기다리다가 혹시 5층 우리 집에 엄마가 돌아와 있는게 아닌가 해서 급히 5층까지 올라가 잠겨 진 문을 확인하고 다시 내려오기를 몇 번씩 되풀이했다. While waiting for my mother, I wondered if my mother was returning to my house on the 5th floor, so I hurriedly went up to the 5th floor, checked the locked door, and came back down several times repeatedly. 母を待っている間、もしかしたら5階の我が家に母が帰ってきているかもしれないと思い、急いで5階まで上がって鍵のかかったドアを確認し、何度も下りることを繰り返した。 나중에는 오르내릴 힘도 없어 현수를 업은 채 주저앉아 버렸다. Later, I didn't have the strength to go up and down, so I sat down with the suspension on. その後、上り下りする力もなく、吊り革を担いだままぐったりしてしまった。

그 당시 내 어깨는 현수의 몸무게에 못 이겨 물집 투성이였다. At that time, my shoulders were blistered because I couldn't beat Sue's weight. 当時、私の肩はヒョンスの体重に負けて水ぶくれだらけだった。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 Narration: The confession of Kim Hyun-hee, a South Korean agent, was Park Soo-hyun in Langd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