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e use cookies to help make LingQ better. By visiting the site, you agree to our cookie policy.


image

김현희의 고백 (Kim Hyun-hee's confession), 나의 어린시절, 첫 번째-1

나의 어린시절, 첫 번째-1

[...]

나의 어린시절, 첫 번째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 수기를 쓰고 싶지 않았다.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 가슴이 아려 왔고, 혁명전사라는 환각에 빠져 물 불을 가리지 못했던 어리석은 과거를 돌아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남조선 려객기 폭파 사건을 생각하면 뼈 아픈 회한을 느껴 참기 어려웠다. 고통스러운 기억은 빨리 잊고 싶은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그 가슴 아리고, 부끄럽고, 끔찍스러운 순간순간을 되살린다는 것은 나로서는 또 다른 고통이였다. 더욱이 머리속에서 영원히 지워버리고 싶은 순간순간을 책으로 써서 남겨야 한다니 더 망설여질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왜 이 글을 써야 하는지 스스로 묻기도 하고, 한편으론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이 글을 끝내야 한다는 다짐도 수없이 했었다. 써놓은 글이 마음에 들지 않아 많은 원고지를 찢어 버리기도 하고,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 때문에 원고지를 얼룩지게 할 때도 많았다. 1987년 남조선 려객기를 폭파하러 떠나는 부분을 시작하면서는 무고하게 희생된 분들과 이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는 유족분들에 대한 죄스러운 마음 때문에 진전을 보지 못하고 많은 날을 망설이며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며칠 전 어렵게 수기를 마치고, 일본 경찰과의 담화가 있은 후 비로소 나는 수기를 쓴 것에 대한 보람을 느꼈다. 보람이라기보다는 당연히 내가 해야 할 일을 했다는 의무 리행이라는 표현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나의 일본인화 교육을 담당했던 ‘리은혜'에 관한 일본 경찰의 추적은 집요했다. 내가 남조선 려객기 폭파 경위 기자회견에서 ‘랍북되여 온 일본 녀인에게 일본인화 교육을 받았다'는 말을 함에 따라, 일본 경찰은 나에게서 리은혜의 모습을 묻고 수사에 착수했었다.

일본 경찰과 서너 차례 담화를 했지만 리은혜의 일본 이름이 처음에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작년 1월 초 일본 북해도에서 열린 유니버시아드 동계올림픽대회 때 삿뽀로 공항 이름이 ‘치도세'라는 것을 보고, 은혜가 얼결에 나에게 자신의 이름이 ‘치도세'라고 말한 것을 기억해내었다.

그 뒤로 일본 경찰은 여러 장의 일본 녀성 사진을 나에게 보여 주었다. 5월 15일에도 나에게 여러 장의 사진을 보여 주면서 ‘리은혜'가 아니냐고 물어 왔다. 내내 엉뚱한 사람들이여서 그만 포기하고 싶어질 무렵 ‘리은혜'의 사진 을 내 앞에 들이밀었다. 그 사진은 내가 평소에 보던 은혜보다 조금 살찐 모습이였는데 그것은 그녀가 허리가 아파 ‘9.15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살이쪄 둥글둥글했던 그 모습이였다. 나는 그 사진을 보는 순간 그리움과 반가움이 한꺼번에 밀어닥치는 느낌을 받았다.

이제 ‘리은혜'가 실종된 일본 녀자임이 밝혀진 이상 그녀는 가족들 곁으로 돌려보내져야 할 것이다. 혹시 이 일로 은혜 신분에 해가 되지 않을까 념려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가족이나 일본 정부가 다 그녀의 귀환에 노력을 기울일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아무리 무지막지한 북조선이라도 은혜를 마구 다루지는 못할 것이 틀림없다.

나는 수기를 쓴 일에 대해 비로소 가슴 뿌듯함을 느낀다. 고통이란/ 피한다고 해서 피해지는 것이 아니라 맞부딪쳐 이겨나가는 방법도 있다는 것을 안 것 같다. 나의 고통이 당연히 받아야 할 고통이라면 희생 당하신 분과 그 가족들의 고통은 아무 죄 없이 타의에 의해 받고 있는 고통일 것이다.

고인이 되신 분들의 영전에 속죄의 제물로 이 수기를 열심히 썼다. 그리고 다정한 사람을 잃은 유가족 여러분께 다시 한번 속죄를 드린다.

이 수기를 마치면서 모든 것을 다 털어 버린 듯 한 홀가분한 기분에 잠시 사로잡히기도 했지만 그것은 단지 나의 기분일 뿐, 실은 아무것도 털어 버린 것이 없음을 새삼 깨닫는다. 한껏 멋을 내고 거리를 활보하는 내 또래의 여자들을 보면서 나 역시 여자임을 늘 의식하고 그들이 마냥 부럽기만 했다. 뻔뻔스러운 바램이겠지만 나는 죄인이기 이전에 스물 몇 살의 단순한 여자이고 싶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


나의 어린시절, 첫 번째-1 Meine Kindheit, die erste - 1 My childhood, first-1 Mi infancia, la primera - 1 私の子供時代、最初の-1 Mijn jeugd, de eerste - 1 Мое детство, первое - 1 Моє дитинство, перше-1 我的童年,第一次 - 1

[...] [...] [...]

나의 어린시절, 첫 번째 My childhood, the first Mon enfance, la première 私の子供時代は、最初の Min barndom, den första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 수기를 쓰고 싶지 않았다. To be honest, I did not want to write this handwriting. Pour être honnête, je ne voulais pas écrire cet essai. 率直に言って、私はこの手記を書きたいと思わなかった。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 가슴이 아려 왔고, 혁명전사라는 환각에 빠져 물 불을 가리지 못했던 어리석은 과거를 돌아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When I recalled my happy childhood, I felt my heart and look back on the foolish past that had fallen into the hallucination of the revolutionary warrior and blocked the water. J'ai mal au cœur quand je me souviens de mon enfance heureuse, et j'ai honte quand je repense à mon passé insensé, quand je n'ai pas su combattre le feu par l'eau en me donnant l'illusion d'être un guerrier révolutionnaire. 幸せだった子供の頃を回想すると胸が痛んきたし、革命戦士と呼ばれる幻覚に陥って水火を選ばなかった愚かな過去を振り返ってみると/恥ずかしいがなかった。 回想起快乐的童年,我心痛不已;回想起愚昧的过去,我羞愧难当,在革命战士的幻想下,我不能以水击火。 남조선 려객기 폭파 사건을 생각하면 뼈 아픈 회한을 느껴 참기 어려웠다. Considering the bombing of the South Korean ship, it was hard to bear the painful regret. 南朝鮮の旅客機爆破事件を考えると、骨の折れるような悔恨を感じ、我慢できなかった。 고통스러운 기억은 빨리 잊고 싶은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그 가슴 아리고, 부끄럽고, 끔찍스러운 순간순간을 되살린다는 것은 나로서는 또 다른 고통이였다. It was another pain for me to revive the painful, embarrassing, and terrible moments of pain because it is a human being who wants to forget painful memories quickly. 苦しい記憶は早く忘れたいのが人間なので、その胸が痛く、恥ずかしく、恐ろしい瞬間瞬間を思い出すのは、私にとってはまた別の苦痛だった。 더욱이 머리속에서 영원히 지워버리고 싶은 순간순간을 책으로 써서 남겨야 한다니 더 망설여질 수밖에 없었다. Moreover, I had to hesitate to write the moment that I want to erase forever in my head. しかも、頭の中から永遠に消し去りたい瞬間を本に書いて残さなければならないと思うと、さらに躊躇するしかなかった。

그동안 왜 이 글을 써야 하는지 스스로 묻기도 하고, 한편으론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이 글을 끝내야 한다는 다짐도 수없이 했었다. In the meantime, I have asked myself why I should write this article, and on the other hand, I have decided to finish this article no matter what happens. この間、なぜこの文章を書かなければならないのか自問自答したり、一方でどんなことがあってもこの文章を終わらせなければならないと何度も誓った。 써놓은 글이 마음에 들지 않아 많은 원고지를 찢어 버리기도 하고,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 때문에 원고지를 얼룩지게 할 때도 많았다. I often tore out many of the manuscripts because I did not like the text I wrote, and I often spotted the manuscripts because of the tears that flowed through me. 書いた文章が気に入らない多くの原稿用紙を引き裂くしまうこともして、思わず涙のために原稿用紙をまだらにする時も多かった。 1987년 남조선 려객기를 폭파하러 떠나는 부분을 시작하면서는 무고하게 희생된 분들과 이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는 유족분들에 대한 죄스러운 마음 때문에 진전을 보지 못하고 많은 날을 망설이며 보내기도 했다. Beginning in 1987 with the departure of the South Korean ship fighter, he was hesitant to spend many days without seeing progress because of his sinful heart for the innocent victims and the bereaved families. 1987年南朝鮮旅客機を爆破しに残し部分を開始し、は罪に犠牲になった方々とそのための痛みを受けている遺族の方々の罪な心のために進展が見られず、多くの日を待ってであり、送信もした。

그러나 며칠 전 어렵게 수기를 마치고, 일본 경찰과의 담화가 있은 후 비로소 나는 수기를 쓴 것에 대한 보람을 느꼈다. But a few days ago, after a difficult period, and after a conversation with the Japanese police, I felt rewarded for writing. しかし、数日前に困難手記を終え、日本の警察との談話があった後、初めて私は手記を書いたことのやりがいを感じました。 보람이라기보다는 당연히 내가 해야 할 일을 했다는 의무 리행이라는 표현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Rather than rewarding, of course, it may be right to say that I am obligated to do what I have to do. やりがいのあるというよりは、当然私すべきことをしたという義務履行という表現が正しいかもしれない。 나의 일본인화 교육을 담당했던 ‘리은혜’에 관한 일본 경찰의 추적은 집요했다. The Japanese police's pursuit of 'Lee Eun Hye', who was in charge of my Japanese painting education, was persistent. 私の日本版画教育を担当していた「李恩恵」に関する日本の警察の追跡は執拗だった。 내가 남조선 려객기 폭파 경위 기자회견에서 ‘랍북되여 온 일본 녀인에게 일본인화 교육을 받았다’는 말을 함에 따라, 일본 경찰은 나에게서 리은혜의 모습을 묻고 수사에 착수했었다. As I said at a news conference on the bombing of the South Korean ship, the Japanese police officers asked me about Lee Eun-hye and embarked on an investigation. 私南朝鮮旅客機爆破経緯記者会見で「ラプブクされてきた日本ニョインに日本版画教育を受けた」という話をすることにより、日本の警察は私から李恩恵の姿を聞き捜査に着手した。

일본 경찰과 서너 차례 담화를 했지만 리은혜의 일본 이름이 처음에는 기억나지 않았다. After three or four conversations with the Japanese police, I did not remember Lee's Japanese name at first. 日本の警察と3~4回談話をしたが、李恩惠の日本名を最初は思い出せなかった。 그러다가 작년 1월 초 일본 북해도에서 열린 유니버시아드 동계올림픽대회 때 삿뽀로 공항 이름이 ‘치도세’라는 것을 보고, 은혜가 얼결에 나에게 자신의 이름이 ‘치도세’라고 말한 것을 기억해내었다. Then, at the Universiade Winter Olympics held in Hokkaido, Japan in early January of last year, I saw Sapporo airport's name as 'Chitose' and remembered that Grace suddenly told me his name was 'Chitose'. そんな中、昨年1月初旬、北海道で開催されたユニバーシアード冬季オリンピック大会で札幌空港の名前が「千歳」となっているのを見て、恵がふと自分の名前を「千歳」と言ったことを思い出しました。

그 뒤로 일본 경찰은 여러 장의 일본 녀성 사진을 나에게 보여 주었다. Since then, the Japanese police have shown me several pictures of Japanese women. その後、日本の警察は、複数枚の日本の女性の写真を私に見せてくれた。 5월 15일에도 나에게 여러 장의 사진을 보여 주면서 ‘리은혜’가 아니냐고 물어 왔다. On May 15, I showed me several pictures and asked if it was Lee Eun-hye. 5月15日にも、私に複数の写真を見せながら「李恩恵」がないか聞いてきた。 내내 엉뚱한 사람들이여서 그만 포기하고 싶어질 무렵 ‘리은혜’의 사진 을 내 앞에 들이밀었다. All the wrong people all the time I wanted to stop giving up a picture of Lee Eun-hye in front of me. ずっと風変わりな人々だったので、ついつい放棄したくなる頃「李恩恵」の写真を私の前には、押した。 그 사진은 내가 평소에 보던 은혜보다 조금 살찐 모습이였는데 그것은 그녀가 허리가 아파 ‘9.15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살이쪄 둥글둥글했던 그 모습이였다. The picture was a bit fatter than usual grace I saw when she was sick and rounded when she was hospitalized at the 9.15 hospital. その写真は、私がいつも見ていたイェウンより少し太った姿だったが、それは彼女が腰を痛めて「9.15病院」に入院していた時に太って丸くなったあの姿だった。 나는 그 사진을 보는 순간 그리움과 반가움이 한꺼번에 밀어닥치는 느낌을 받았다. As soon as I saw the picture, I felt the feeling of longing and welcome. 私はその写真を見た瞬間、懐かしさと嬉しさが一気に押し寄せるような感覚を覚えた。

이제 ‘리은혜’가 실종된 일본 녀자임이 밝혀진 이상 그녀는 가족들 곁으로 돌려보내져야 할 것이다. Now that Lee Eun-hye is found to be a missing Japanese woman, she should be returned to her family. 今、「李恩恵」が行方不明の日本人女性であることが判明した以上、彼女は家族の元に戻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 혹시 이 일로 은혜 신분에 해가 되지 않을까 념려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There are many people who are worried that this will harm their grace status, but I don't think so. もしかしたら、この件で恵みの身分を害するのではないかと心配する人が多いですが、私はそうは思いません。 가족이나 일본 정부가 다 그녀의 귀환에 노력을 기울일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아무리 무지막지한 북조선이라도 은혜를 마구 다루지는 못할 것이 틀림없다. Her family and the Japanese government will all endeavor to return to her, and in that case, even the most terrible North Koreans will not be able to deal with grace. 家族も日本政府も彼女の帰国に尽力するだろうし、そうなれば、いくら無知な北朝鮮でも恩を仇で返すことはできないに違いない。

나는 수기를 쓴 일에 대해 비로소 가슴 뿌듯함을 느낀다. I finally feel proud of my heart for writing the note. 私は手記を書いたことに、初めて誇りを感じる。 고통이란/ 피한다고 해서 피해지는 것이 아니라 맞부딪쳐 이겨나가는 방법도 있다는 것을 안 것 같다. It seems that you know that pain is not avoided by avoiding, but there is a way to overcome it. 苦しみとは/避けるからといって避けるのではなく、立ち向かい、乗り越える方法もあることを知ったような気がする。 나의 고통이 당연히 받아야 할 고통이라면 희생 당하신 분과 그 가족들의 고통은 아무 죄 없이 타의에 의해 받고 있는 고통일 것이다. If my suffering is to be suffered naturally, the suffering of the victim and his family will be the suffering that is suffered by the other without any sin. 私の苦痛が当然受けるべき苦痛であれば、犠牲遭われた方は、家族の苦痛は何の罪なく他意によって受けている苦痛である。

고인이 되신 분들의 영전에 속죄의 제물로 이 수기를 열심히 썼다. I wrote this diligently as a sin offering to the deceased people. 故人となられた方々の霊前に贖罪の供物には手記を熱心に書いた。 그리고 다정한 사람을 잃은 유가족 여러분께 다시 한번 속죄를 드린다. And once again, I offer my atonement to the bereaved families who have lost a dear person. そして優しい人を失った遺族の皆様に改めて贖罪を申し上げる。

이 수기를 마치면서 모든 것을 다 털어 버린 듯 한 홀가분한 기분에 잠시 사로잡히기도 했지만 그것은 단지 나의 기분일 뿐, 실은 아무것도 털어 버린 것이 없음을 새삼 깨닫는다. As I finished this note, I was captivated for a while by the feeling of emptiness, as if everything had been wiped out, but I realized that it was just my feeling, and that I had not really wiped out anything. この手記を書き終えて、すべてを払いのけたようなホッとした気分に一瞬とらわれることもあったが、それはあくまで私の気持ちであって、実は何も払いのけたものはないことを改めて実感する。 한껏 멋을 내고 거리를 활보하는 내 또래의 여자들을 보면서 나 역시 여자임을 늘 의식하고 그들이 마냥 부럽기만 했다. Seeing women of my age walking the streets with great fashion, I was always conscious that I was a woman too, and I was just envious of them. 思いっきりおしゃれをして街を歩く同年代の女性たちを見て、自分も女であることを常に意識し、彼女たちがうらやましく思えて仕方なかった。 뻔뻔스러운 바램이겠지만 나는 죄인이기 이전에 스물 몇 살의 단순한 여자이고 싶다. It's a shameful desire, but I want to be a simple woman of twenty years old before I'm a sinner. 恥知らずな願望かもしれないが、私は罪人である前に、二十数歳の素朴な女でありたい。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 Narration: Confession of Kim Hyeon-hee, a South Korean agent, was Park Soo-hyun in Langd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