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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희의 고백 (Kim Hyun-hee's confession), 나의 어린시절, 아홉 번째-9

나의 어린시절, 아홉 번째-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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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린시절, 아홉 번째

나는 이곳 남조선에서 지내면서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이 거리에 굴러다니는 파지와 공병, 알루미늄 깡통들이다. 그것을 보면 나도 모르게 줍고 싶은 마음이 된다. 다시 쓸 수 있는 것들인데 쓰레기장 근처나 유원지에 가면 여기저기에 마구 그것들이 버려져 있어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이미 어린 나이에 철두철미하게 습관이 들어서인지 쉽게 그것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물건 사면서 받아오는 종이가방도 나는 아직 한 장도 버리지 못한 채 다 모아두고 있다. 옆구리 터진 종이가방까지도 차마 버릴 수가 없었다. 수사관들이 함께 길을 지나가다 버려진 파지를 보면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며 파지들을 가리킨다.

“저것도 가져가서 챙겨. 저기 저기도 있네”

그들은 롱담처럼 내 버릇을 지적하는 것이였지만 나는 정말 그 파지들을 들고 가고픈 심정이였다. 고급스럽게 코팅되고 색깔도 고운 멀쩡한 봉투들이 마구 버려져 있는 것을 자주 본다. 북조선의 ‘꼬마 수매사업' 을 하는 아이들이 본다면 서로 가져가려고 다툴 것이다. 인민학교 생활 시절에 했던 각종 활동 중에 어려운 것을 꼽으라고 한다면 ‘인분모으기'일 것이다. 그러나 1월1일과 김일성 생일 때 김일성 동상 앞에 충성의 생화를 바치는 사업보다는 쉽다. 원래 생화를 파는 곳이 없는데다가 신년은 겨울철 이므로 꽃을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이다. 하는 수 없이 온실을 찾아가 안면 치기를 하여 꽃을 구하는 수밖에 없다.

4.15 때는 주로 진달래꽃을 많이 바치는데 철이 좀 이르기 때문에 3월 말경에 산에 가서 꽃망울 진 진달래를 꺾어다가 따뜻한 방에서 꽃을 활짝 피우게 하여 바쳤다. 하도 진달래꽃만 바치다나니까 최근에는 다른 생화를 바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나는 인민학교 때 다른 아이들보다 더 바쁘게 여기저기 뽑혀 다녔다. 그중에서도 가장 힘들었고 가장 추억에 남아 있는 것은 배우로 선발되어 영화 촬영에 동원 되였던 일이다. 멋모르고 해내면서도 동무들의 부러움을 사고 주변 사람들의 귀여움을 받는다는 일이 행복하고 즐거웠었다. 그 기억은 나에게는 소중한 기억 이였다.

2학년에 막 올라갔을 때 인데 그날은 오후반 이였다. 선생님이 나를 불러 운동장에 나가 보니 작은 뻐스에 이미 남녀 아이들 6명이 타고 있었다.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차에 오르면서도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했다.

그제서야 며칠 전 낯선 40대 남자가 아이들을 자세히 관찰하며 다니다가 내 앞에 딱 멈춰서서 내 이름을 묻던 일이 생각났다. 그 남자는 얼마 후 3,4 학년 모임 때 정렬해 있는 몇 백 명의 아이들 중 3학년 남자아이와 나를 함께 정문에 세워 놓고 정면과 측면 사진을 찍어 갔었다. 나는 연출가와 촬영가들 앞에서 앞뒤로 돌며 인물 심사도 받았다. 웃어 보이기도 하고 우는 시늉도 해보고 여러 가지 질문에 답변도 했다.

“아버지 직장이 어디지?” “집은 어디구?” “영화 본 적은 있니?” “어떤 책을 좋아하지?” “학교에서 주로 뭘 하지?”

한 연출가가 “얘가 큰 영옥이를 많이 닮은것 같아.........”라고 중얼거렸다.

그들은 여러 심사를 거친 끝에 집으로 돌려보내 주었다. 집에 돌아와서 부모님께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더니 어머니는, 우리 딸이 영화에도 다 나온다며 아주 기뻐하셨지만 아버지는 별로 탐탁치 않은 표정을 지으셨다. 그러나 그다지 반대하지는 않아서 다행 이였다.

얼마 후 내가 ‘사회주의 조국을 찾은 영수와 영옥' 이라는 영화에 ‘ 영옥' 의 어린 시절 역으로 뽑혔다고 학교를 통해서 어머니에게로 통지가 왔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


나의 어린시절, 아홉 번째-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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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린시절, 아홉 번째 My childhood, the ninth

나는 이곳 남조선에서 지내면서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이 거리에 굴러다니는 파지와 공병, 알루미늄 깡통들이다. The most unfortunate thing I have been living here in South Korea is the phage, the engineer, and the aluminum cans that roll on the streets. 私はここ南朝鮮に住んでいて最も残念に思うのは、路上に転がっている屑や空き瓶、アルミ缶です。 그것을 보면 나도 모르게 줍고 싶은 마음이 된다. When I look at it, I feel like I want to pick it up without knowing it. それを見ると、思わず手に取りたくなります。 다시 쓸 수 있는 것들인데 쓰레기장 근처나 유원지에 가면 여기저기에 마구 그것들이 버려져 있어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There are things that can be rewritten, but if you go to a garbage canal or an amusement park, they are dumped here and there. 再利用できるものなのに、ゴミ置き場の近くや遊園地に行くと、あちこちに捨てられていて、もったいないなと思いました。 이미 어린 나이에 철두철미하게 습관이 들어서인지 쉽게 그것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I can not easily get rid of it because I have a habit of doing so well at a young age. すでに幼い頃から徹底して習慣化されたせいか、なかなかそれを振り払うことができない。 물건 사면서 받아오는 종이가방도 나는 아직 한 장도 버리지 못한 채 다 모아두고 있다. I have not collected a piece of paper bag that I bought while buying things. 買い物の際にもらえる紙袋も、私はまだ一枚も捨てずに全部集めています。 옆구리 터진 종이가방까지도 차마 버릴 수가 없었다. I couldn't even throw a bag of paper out of my side. 側面の破れた紙袋まで捨て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수사관들이 함께 길을 지나가다 버려진 파지를 보면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며 파지들을 가리킨다. When the investigators walk through the street together, they discard the abandoned phages and stab my side to them. 捜査官たちが一緒に道を通っていて、捨てられたファージを見ると、私の脇腹を突いてファージを指差す。

“저것도 가져가서 챙겨. “Take that and take it. "あれも持って行ってね。 저기 저기도 있네” あそこにもあるね"

그들은 롱담처럼 내 버릇을 지적하는 것이였지만 나는 정말 그 파지들을 들고 가고픈 심정이였다. They were pointing out my habits like Longdam, but I really wanted to carry them. 彼らは竜胆のように私の癖を指摘するのだが、私は本当にそのファジィを持って行きたい心境だった。 고급스럽게 코팅되고 색깔도 고운 멀쩡한 봉투들이 마구 버려져 있는 것을 자주 본다. Frequently, finely coated, fine-colored envelopes are often thrown away. 高級なコーティングが施され、色もきれいな無傷の封筒が大量に捨てられているのをよく見かけます。 북조선의 ‘꼬마 수매사업' 을 하는 아이들이 본다면 서로 가져가려고 다툴 것이다. If children in North Korea's "little purchase business" see it, they will quarrel with each other. 北朝鮮の'子守り事業'をする子供たちが見たら、お互いに奪い合いになるだろう。 인민학교 생활 시절에 했던 각종 활동 중에 어려운 것을 꼽으라고 한다면 ‘인분모으기’일 것이다. The most difficult thing to do during the school life was to collect people. 人民学校時代に行った様々な活動の中で難しかったことを挙げるとすれば、「人数の計算」だろう。 그러나 1월1일과 김일성 생일 때 김일성 동상 앞에 충성의 생화를 바치는 사업보다는 쉽다. However, on January 1 and Kim Il-sung's birthday, it is easier than the project of loyalty before Kim Il-sung's statue. しかし、1月1日と金日成の誕生日に金日成像の前に忠誠の生花を奉納する事業よりは簡単だ。 원래 생화를 파는 곳이 없는데다가 신년은 겨울철 이므로 꽃을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이다. もともと生花を売っているところがない上に、新年は冬季なので、花を手に入れるのは至難の業です。 하는 수 없이 온실을 찾아가 안면 치기를 하여 꽃을 구하는 수밖에 없다. There is no choice but to go to the greenhouse to get some flowers by facial treatment. 仕方なく温室を訪れ、顔色を伺い花を手に入れるしかない。

4.15 때는 주로 진달래꽃을 많이 바치는데 철이 좀 이르기 때문에 3월 말경에 산에 가서 꽃망울 진 진달래를 꺾어다가 따뜻한 방에서 꽃을 활짝 피우게 하여 바쳤다. 4.15の時は、主にツツジの花をたくさん奉納するのですが、時期が少し早いので、3月末頃に山に行き、花のつぼみのあるツツジを摘んで、暖かい部屋で花を咲かせて奉納しました。 하도 진달래꽃만 바치다나니까 최근에는 다른 생화를 바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あまりにもツツジの花ばかりを奉納していたため、最近では他の生花を奉納するよう指示が下りました。

나는 인민학교 때 다른 아이들보다 더 바쁘게 여기저기 뽑혀 다녔다. 私は人民学校の時、他の子供たちよりも忙しくあちこち引っ張り回されました。 그중에서도 가장 힘들었고 가장 추억에 남아 있는 것은 배우로 선발되어 영화 촬영에 동원 되였던 일이다. Among them, the most difficult and the most memorable ones were selected as actors and mobilized for filming. その中でも一番大変で、一番思い出に残っているのは、俳優として抜擢されて映画撮影に動員されたことです。 멋모르고 해내면서도 동무들의 부러움을 사고 주변 사람들의 귀여움을 받는다는 일이 행복하고 즐거웠었다. I was happy and happy to be envious of my colleagues and to be cute by those around me. 何も知らずにやり遂げながらも、仲間に羨ましがられ、周りの人に可愛がられることが幸せで楽しかった。 그 기억은 나에게는 소중한 기억 이였다.

2학년에 막 올라갔을 때 인데 그날은 오후반 이였다. 선생님이 나를 불러 운동장에 나가 보니 작은 뻐스에 이미 남녀 아이들 6명이 타고 있었다. When the teacher called me out to the playground, there were already six boys and girls riding on a small kuck. 先生に呼ばれて運動場に出ると、小さなバスにすでに男女6人が乗っていました。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차에 오르면서도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했다. I was bewildered not knowing English while getting in the car as the teacher directed.

그제서야 며칠 전 낯선 40대 남자가 아이들을 자세히 관찰하며 다니다가 내 앞에 딱 멈춰서서 내 이름을 묻던 일이 생각났다. Only a few days ago I remembered an unfamiliar man in his 40s looking closely at the children and stopping at me and asking for my name. ふと、数日前、見知らぬ40代の男性が子供たちをよく観察して回っていたところ、私の前でぴたりと立ち止まって私の名前を聞いてきたことを思い出しました。 그 남자는 얼마 후 3,4 학년 모임 때 정렬해 있는 몇 백 명의 아이들 중 3학년 남자아이와 나를 함께 정문에 세워 놓고 정면과 측면 사진을 찍어 갔었다. その男は、しばらくして3,4年生の集まりで整列している数百人の子供たちの中で、3年生の男の子と私を一緒に正門に立たせて正面と側面の写真を撮っていった。 나는 연출가와 촬영가들 앞에서 앞뒤로 돌며 인물 심사도 받았다. I went back and forth in front of the director and the photographers and was also screened for portraits. 私は演出家やカメラマンの前で前後に回り、人物審査も受けた。 웃어 보이기도 하고 우는 시늉도 해보고 여러 가지 질문에 답변도 했다. He smiled, pretended to cry, and answered many questions. 笑ってみたり、泣くふりをしてみたり、いろいろな質問に答えていました。

“아버지 직장이 어디지?”  “집은 어디구?”  “영화 본 적은 있니?”  “어떤 책을 좋아하지?”  “학교에서 주로 뭘 하지?” "Where is your father's job?" "Where is your home?" "Have you ever seen a movie?" "What books do you like?" "お父さんの職場はどこ?" "家はどこ?" "映画を見たことは?" "どんな本が好き?" "学校で主に何をするの?"

한 연출가가 “얘가 큰 영옥이를 많이 닮은것 같아.........”라고 중얼거렸다. ある演出家が「この子は大きなヨンオクによく似ている.........」とつぶやいた。

그들은 여러 심사를 거친 끝에 집으로 돌려보내 주었다. 彼らは様々な審査の後、家に帰してくれた。 집에 돌아와서 부모님께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더니 어머니는, 우리 딸이 영화에도 다 나온다며 아주 기뻐하셨지만 아버지는 별로 탐탁치 않은 표정을 지으셨다. When I returned home and told my parents about the paper, my mother was very happy that my daughter was in the movie, but my father looked very ugly. 家に帰って両親に事情を話すと、母は、うちの娘が映画にも出るんだ、と大喜びでしたが、父はあまり気に入らない様子でした。 그러나 그다지 반대하지는 않아서 다행 이였다. しかし、あまり反対されなかったので良かった。

얼마 후 내가 ‘사회주의 조국을 찾은 영수와 영옥' 이라는 영화에 ‘ 영옥' 의 어린 시절 역으로 뽑혔다고 학교를 통해서 어머니에게로 통지가 왔다. A short time later, a notice was sent to my mother through the school that I was chosen as the childhood role of 'Young Ok' in the movie 'Young Soo and Young Ok' who visited the socialist motherland. しばらくして、私が「社会主義祖国を探した霊獣と霊玉」という映画に「霊玉」の幼少期役に抜擢されたと学校から母に通知が来た。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 Narration: Park Hyun-hyun was a confession of Kim Hyun-hee, Rang Dok, Daenam Institute of Technolog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