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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희의 고백 (Kim Hyun-hee's confession), 나의 대학시절, 다섯 번째-25

나의 대학시절, 다섯 번째-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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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대학시절, 다섯 번째

내가 평양 외국어대학에 입학하던 해에 대학 창립 20주년을 맞아 기념행사를 대대적으로 벌려 대학 전체가 몇 달 동안 그 준비로 들끓었다. 예술공연 준비를 하는 데만 전교 학생의 1/3 이 동원되었다. 100여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합창단과 무용, 시, 중창, 독창, 노래 이야기 같은 종목으로 나누어져 예술 써클이 꾸려졌다.

거의 매일 밤 12시까지 연습했다. 나는 처음에는 무용조에 가담되여 련습했는데 너무나 힘들어 얼굴이 반쪽이 되다시피 했다. 다 큰 녀자가 무용한다며 뛰는게 창피하다고 생각하던 중 마침 화술조에서 자기네 조로 오라는 교섭이 들어와 무용조를 중도에서 그만두고 화술조에 가서 노래 이야기를 맡았다.

각 조마다 자기들 프로를 잘 꾸리기 위해 안면이 있는 대로 재간껏 외부의 연주단이나 촬영소, 무용 지도원 등의 전문적인 사람들을 초청해 지도를 받아 연습을 하며 야단이였다. 우리 화술조 성원 중에는 4.25조선예술영화촬영소 총장 ‘차계룡'의 딸도 있고 문화부 부부장 ‘장철'의 아들도 끼여 있어서 그들의 힘으로 유명한 연출가나 배우를 초청해 개별지도를 받았다. 4.25예술영화촬영소에서는 연출가이자 영화배우인 ‘태호' 라는 별명을 가진 45세쯤의 남자가 며칠 동안 와서 우리의 연기와 동작을 지도해 주었다. 우리는 영화 화면을 통해 그의 얼굴이 낮익어 잘 알고 있었다. 또 ‘목란꽃' 이라는 첩보영화에서 ‘청개구리' 라고 불리우던 배우도 왔었고 인민배우이자 평양 국립극장 연극단 단장인 ‘리단' 까지 와서 우리를 지도했다. 그들은 연기 지도 외에도 휴식 시간이면 자신이 쓰고 있는 시나리오 내용을 구수하게 들려주거나 자신들의 지나온 추억담을 재미있게 이야기해 주어 그들 주변에는 언제나 많은 애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이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연기 시범을 보일때는 작품 속에 완전히 빠져들어 표정이나 대사가 너무나 자연스러웠기 때문에 학생들은 넋이 빠져 바라보면서 부러워하였다. 어떤 학생은 그들의 지도대로 감정을 넣어가며 열성적으로 해 보이기도 했지만 나는 부끄럼을 많이 타는 탓에 잘 되지 않았다. 더욱이 그들의 연기에 비해 보면 너무 형편없는 내 연기가 창피스럽게 여겨졌다.

우리가 맡은 극의 주제는 추운 겨울에 외국어 실습을 위해 외국인 관광 안내를 나간 학생들에게 김일성이 직승기를 보내 솜동복과 신발 등 사랑의 선물을 보내 준다는 아주 단순한 내용이였다. 선물을 실은 직승기가 도착할 때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서로 부둥켜 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연기하는 곳에선 눈물이 나오지 않아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내 생각에는 연습을 하면서도 그 감정이 절실하게 가슴에 와닿지 않아서 작품속에 몰입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내가 속한 화술조에는 로어과에 다니던 명숙이라는 애가 나와 마찬가지로 나이가 어렸다. 명숙이 아버지는 왕별을 단 호위국 고급 군관이기 때문에 김일성이 거처하는 주석궁 주변 아빠트에 살고 있었다. 집에는 북조선에서 몇 대 안된다는 대형 천연색텔레비죤를 가지고 있을만큼 부유하게 살았다. 그래서 그런지 명숙이는 자유주의가 심하고 돈과 음식을 펑펑 쓰면서 동무들의 환심을 샀다. 상급학년 언니나 오빠에게 반말을 하는 건 례사이고 남자들에게 까불면서 발길질이나 돌팔매질을 하여 버릇없는 아이로 소문이 나 있었다.

어느날 화술조 련습을 하다가 또 명숙이가 없어져 지도 선생이 나에게 찾아오라고 했다. 나는 그 애가 사는 아빠트에 갔으나 호위국 보초가 서 있기 때문에 아무나 출입할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 앞에 놀고있던 아빠트에 사는 아이를 시켜 명숙이를 불러내라고 했더니 아빠트에는 아무도 없다며 그냥 돌아왔다. 돌아와서 나는 선생에게 그대로 보고했다. 평소부터 그애를 좋지 않게 보고 있던 선생이 이것을 구실로 써클 소조원 총화 때 명숙이를 무대 우에 올려 세워 한바탕 비판을 해댔다.

내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


나의 대학시절, 다섯 번째-25 Meine Studienzeit, fünfte bis 25. My College Years, Fifth -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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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대학시절, 다섯 번째 My college days, fifth

내가 평양 외국어대학에 입학하던 해에 대학 창립 20주년을 맞아 기념행사를 대대적으로 벌려 대학 전체가 몇 달 동안 그 준비로 들끓었다. 예술공연 준비를 하는 데만 전교 학생의 1/3 이 동원되었다. 100여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합창단과 무용, 시, 중창, 독창, 노래 이야기 같은 종목으로 나누어져 예술 써클이 꾸려졌다.

거의 매일 밤 12시까지 연습했다. 나는 처음에는 무용조에 가담되여 련습했는데 너무나 힘들어 얼굴이 반쪽이 되다시피 했다. 다 큰 녀자가 무용한다며 뛰는게 창피하다고 생각하던 중 마침 화술조에서 자기네 조로 오라는 교섭이 들어와 무용조를 중도에서 그만두고 화술조에 가서 노래 이야기를 맡았다. 大人が踊るなんて恥ずかしいと思っていたところ、ちょうど華術組から自分たちの組に来いという交渉があり、踊り組を途中でやめて華術組に行き、歌の話を担当した。

각 조마다 자기들 프로를 잘 꾸리기 위해 안면이 있는 대로 재간껏 외부의 연주단이나 촬영소, 무용 지도원 등의 전문적인 사람들을 초청해 지도를 받아 연습을 하며 야단이였다. 各グループは、自分たちのプロを作るために、顔見知りの演奏団や撮影所、ダンス指導員などのプロの方々を招き、指導を受けながら練習に励んでいた。 우리 화술조 성원 중에는 4.25조선예술영화촬영소 총장 ‘차계룡'의 딸도 있고 문화부 부부장 ‘장철'의 아들도 끼여 있어서 그들의 힘으로 유명한 연출가나 배우를 초청해 개별지도를 받았다. 私たち華術班のメンバーの中には、4.25朝鮮芸術映画撮影所総長「チャ・ゲリョン」の娘もいるし、文化部副部長「チャン・チョル」の息子も入っていて、彼らの力で有名な演出家や俳優を招いて個別指導を受けた。 4.25예술영화촬영소에서는 연출가이자 영화배우인 ‘태호' 라는 별명을 가진 45세쯤의 남자가 며칠 동안 와서 우리의 연기와 동작을 지도해 주었다. 우리는 영화 화면을 통해 그의 얼굴이 낮익어 잘 알고 있었다. 또 ‘목란꽃' 이라는 첩보영화에서 ‘청개구리' 라고 불리우던 배우도 왔었고 인민배우이자 평양 국립극장 연극단 단장인 ‘리단' 까지 와서 우리를 지도했다. 그들은 연기 지도 외에도 휴식 시간이면 자신이 쓰고 있는 시나리오 내용을 구수하게 들려주거나 자신들의 지나온 추억담을 재미있게 이야기해 주어 그들 주변에는 언제나 많은 애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이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연기 시범을 보일때는 작품 속에 완전히 빠져들어 표정이나 대사가 너무나 자연스러웠기 때문에 학생들은 넋이 빠져 바라보면서 부러워하였다. 어떤 학생은 그들의 지도대로 감정을 넣어가며 열성적으로 해 보이기도 했지만 나는 부끄럼을 많이 타는 탓에 잘 되지 않았다. 더욱이 그들의 연기에 비해 보면 너무 형편없는 내 연기가 창피스럽게 여겨졌다.

우리가 맡은 극의 주제는 추운 겨울에 외국어 실습을 위해 외국인 관광 안내를 나간 학생들에게 김일성이 직승기를 보내 솜동복과 신발 등 사랑의 선물을 보내 준다는 아주 단순한 내용이였다. 私たちが担当した劇のテーマは、寒い冬に外国語実習のために外国人観光案内に出た学生たちに、金日成が直行便を送り、綿東服や靴などの愛のプレゼントを送るというとてもシンプルな内容でした。 선물을 실은 직승기가 도착할 때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서로 부둥켜 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연기하는 곳에선 눈물이 나오지 않아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プレゼントを積んだ直行便が到着したとき、感激して抱き合い、喜びの涙を流すシーンを演じるところでは、涙が出ずぎこちない。 내 생각에는 연습을 하면서도 그 감정이 절실하게 가슴에 와닿지 않아서 작품속에 몰입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私の考えでは、練習をしていても、その感情が切実に胸に届かず、作品に没頭できていないのではないかと思いました。

내가 속한 화술조에는 로어과에 다니던 명숙이라는 애가 나와 마찬가지로 나이가 어렸다. 私が所属する華術組には、ロア科に通っていたミョンスクという子が私と同じように年下だった。 명숙이 아버지는 왕별을 단 호위국 고급 군관이기 때문에 김일성이 거처하는 주석궁 주변 아빠트에 살고 있었다. 明淑の父親は王星をつけた護衛局高級軍人であるため、金日成が居住する 주석궁周辺に住んでいた。 집에는 북조선에서 몇 대 안된다는 대형 천연색텔레비죤를 가지고 있을만큼 부유하게 살았다. 家には北朝鮮で数台しかない大型の天然色テレビを持つほど裕福に暮らしていた。 그래서 그런지 명숙이는 자유주의가 심하고 돈과 음식을 펑펑 쓰면서 동무들의 환심을 샀다. そのためか、ミョンスクは自由主義が強く、お金と食べ物をふんだんに使って同志の歓心を買った。 상급학년 언니나 오빠에게 반말을 하는 건 례사이고 남자들에게 까불면서 발길질이나 돌팔매질을 하여 버릇없는 아이로 소문이 나 있었다. 上級生のお姉さんやお兄さんに悪口を言うのは当たり前で、男子に怒鳴りつけたり、蹴ったり、石を投げつけたりして甘やかされて育ったと噂されていた。

어느날 화술조 련습을 하다가 또 명숙이가 없어져 지도 선생이 나에게 찾아오라고 했다. ある日、話術調の練習をしていると、またミョンスクがいなくなり、指導の先生が私に来るように言われました。 나는 그 애가 사는 아빠트에 갔으나 호위국 보초가 서 있기 때문에 아무나 출입할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 앞에 놀고있던 아빠트에 사는 아이를 시켜 명숙이를 불러내라고 했더니 아빠트에는 아무도 없다며 그냥 돌아왔다. 仕方なく、その前で遊んでいたアパートに住む子供にミョンスクを呼び出すように頼んだら、アパートに誰もいないと言ってそのまま帰ってきた。 돌아와서 나는 선생에게 그대로 보고했다. 평소부터 그애를 좋지 않게 보고 있던 선생이 이것을 구실로 써클 소조원 총화 때 명숙이를 무대 우에 올려 세워 한바탕 비판을 해댔다. 普段から彼女を良く思っていなかった先生は、これを口実に、サークル小組総会の時に明淑をステージ右に立たせ、批判を浴びせた。

내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