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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희의 고백 (Kim Hyun-hee's confession), 절망의 나날, 첫 번째-97

절망의 나날, 첫 번째-97

[...]

절망의 나날, 첫 번째

온통 흰 색깔의 방 한가운데 내가 누워 있었다.

나는 어슴프레 떴던 눈을 감았다가 다시 눈에 힘을 주어 크게 떠 보았다. 사람들의 말소리도 어렴풋이 들려왔다. 바레인 말도 들렸고 영어도 들렸다.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그만큼 머릿속이 혼미했다. 꿈은 아닌 것 같았다.

창문 하나 없는 방이어서, 밤인지 낮인지 알 길이 없었다. 내 왼쪽 손목은 수갑에 채워져 있었고 굵은 쇠사슬에 연결되어 침대 다리에 꽁꽁 묶여 있었다. 산소 호흡과 위 세척을 위해 코와 입에 호수가 넣어져 있고 팔에는 주사기가 꽂힌 채였다.

‘앗! ' 그 순간 나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절망감으로 탄식했다. ‘죽었어야만 하는데 살아나다니 큰일났구나' 하는 마음이 제일 먼저 들었다. 살았다는 것은 기쁨이 아니라 고통의 시작임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막막해짐을 느꼈다. 침대 곁에는 아랍 전통 옷을 입은 바레인 사람들과 간호사들이 내 병상을 지키고 있었고 밖에는 검정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기관단총 총구를 45도 각도로 세우고 곧 사격할 자세로 서 있었다.

정신은 차츰 깨어났으나 나는 눈 뜰 기력도 없었고 그럴 마음도 나지 않아 다시 눈을 스르르 감아 버렸다. 그대로 영원히 눈을 감고 싶은 마음만이 간절했다.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에 나는 놀랐고 이것이 현실이 아니기를 빌었다. 꿈이기를 빌었고 죽음으로 가는 중에 이승의 문턱을 넘어서는 마지막 순간이기를 빌었다. 몸을 조금 움직여 허벅지를 꼬집어 보았다. 아팠다. 꿈이 아님을 확인하고 나는 또 한 번 절망적이라고 생각했다. 오른쪽 무릎에 심하게 통증이 일었다. 아마 정신을 잃고 넘어지면서 다친 모양이었다.

분명히 독약이 든 려과담배를 깨물었는데 어째서 살아났단 말인가? 기가 찰 노릇이었다. 죽지 못하고 살아난 질긴 목숨이 차라리 저주스러웠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쓰더라도 죽어야만 해.”

나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혼미한 상태에서도 오로지 그 일념만은 버리지 않았다. 눈을 감고 있다가 잠깐 또다시 의식을 잃었지만 무의식 속에서도 어떻게 하면 죽을 수 있을까 하고 방법을 찾는 꿈을 꾸었다. 간호사들이 사용하는 가위를 빼앗으면 자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몸은 이미 꽁꽁 묶여 옴쭉달싹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조금 지나자 산소호흡기와 입안의 호수가 제거되었는데 나는 옳다구나 하고 혀를 콱 깨물어 보았다. 죽기를 작정하고 깨물었지만 기절을 할 정도로 아프기만 하고 상처만 났을 뿐 혀는 끊어지지 않았다. 옛날에 혀를 깨물고 죽었느니 하는 소리를 많이 들었지만 그건 엉터리인 성싶었다. 아니면 정말 독하고도 독한 사람들이나 해낼 수 있는 일일 것 같았다. 일이 워낙 급하다나니 그런 어처구니없는 짓도 해보았다.

혀를 깨무는 일을 실패하고 궁리 끝에 숨 쉬지 않는 방법도 써 보았다. 숨을 멈추고 있으면 얼굴이 빨개지고 얼굴이 퉁퉁 부풀어 오르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그러면 나는 ‘조금만 더, 조금만 더'하면서 참아 보지만 그게 그렇게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님을 알았다. 나도 모르게 그만 숨이 터져 나와 버리는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웃음이 날 정도로 어리석은 짓이었지만 그 당시 나로서는 더할 수 없이 절박한 입장이었다. 별별 생각을 다 해보고 별 궁리를 다 짜내어 보아도 죽을 방법은 없고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이렇게 되살아났으니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김승일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 사람은 보통 때도 워낙 허약한 사람이어서 죽었을거야! ' 김승일이 죽었다고 생각하니 그가 부럽고, 나는 더욱 겁이 났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


절망의 나날, 첫 번째-97 Tage der Verzweiflung, Die Erste - 97 Days of Despair, The First -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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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나날, 첫 번째

온통 흰 색깔의 방 한가운데 내가 누워 있었다.

나는 어슴프레 떴던 눈을 감았다가 다시 눈에 힘을 주어 크게 떠 보았다. 사람들의 말소리도 어렴풋이 들려왔다. 바레인 말도 들렸고 영어도 들렸다.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그만큼 머릿속이 혼미했다. 꿈은 아닌 것 같았다.

창문 하나 없는 방이어서, 밤인지 낮인지 알 길이 없었다. 내 왼쪽 손목은 수갑에 채워져 있었고 굵은 쇠사슬에 연결되어 침대 다리에 꽁꽁 묶여 있었다. 산소 호흡과 위 세척을 위해 코와 입에 호수가 넣어져 있고 팔에는 주사기가 꽂힌 채였다.

‘앗! ' 그 순간 나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절망감으로 탄식했다. ‘죽었어야만 하는데 살아나다니 큰일났구나' 하는 마음이 제일 먼저 들었다. 살았다는 것은 기쁨이 아니라 고통의 시작임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막막해짐을 느꼈다. 침대 곁에는 아랍 전통 옷을 입은 바레인 사람들과 간호사들이 내 병상을 지키고 있었고 밖에는 검정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기관단총 총구를 45도 각도로 세우고 곧 사격할 자세로 서 있었다.

정신은 차츰 깨어났으나 나는 눈 뜰 기력도 없었고 그럴 마음도 나지 않아 다시 눈을 스르르 감아 버렸다. 그대로 영원히 눈을 감고 싶은 마음만이 간절했다.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에 나는 놀랐고 이것이 현실이 아니기를 빌었다. 꿈이기를 빌었고 죽음으로 가는 중에 이승의 문턱을 넘어서는 마지막 순간이기를 빌었다. 몸을 조금 움직여 허벅지를 꼬집어 보았다. 아팠다. 꿈이 아님을 확인하고 나는 또 한 번 절망적이라고 생각했다. 오른쪽 무릎에 심하게 통증이 일었다. 아마 정신을 잃고 넘어지면서 다친 모양이었다.

분명히 독약이 든 려과담배를 깨물었는데 어째서 살아났단 말인가? 기가 찰 노릇이었다. 죽지 못하고 살아난 질긴 목숨이 차라리 저주스러웠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쓰더라도 죽어야만 해.”

나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혼미한 상태에서도 오로지 그 일념만은 버리지 않았다. 눈을 감고 있다가 잠깐 또다시 의식을 잃었지만 무의식 속에서도 어떻게 하면 죽을 수 있을까 하고 방법을 찾는 꿈을 꾸었다. 간호사들이 사용하는 가위를 빼앗으면 자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몸은 이미 꽁꽁 묶여 옴쭉달싹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조금 지나자 산소호흡기와 입안의 호수가 제거되었는데 나는 옳다구나 하고 혀를 콱 깨물어 보았다. 죽기를 작정하고 깨물었지만 기절을 할 정도로 아프기만 하고 상처만 났을 뿐 혀는 끊어지지 않았다. 옛날에 혀를 깨물고 죽었느니 하는 소리를 많이 들었지만 그건 엉터리인 성싶었다. 아니면 정말 독하고도 독한 사람들이나 해낼 수 있는 일일 것 같았다. 일이 워낙 급하다나니 그런 어처구니없는 짓도 해보았다.

혀를 깨무는 일을 실패하고 궁리 끝에 숨 쉬지 않는 방법도 써 보았다. 숨을 멈추고 있으면 얼굴이 빨개지고 얼굴이 퉁퉁 부풀어 오르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그러면 나는 ‘조금만 더, 조금만 더'하면서 참아 보지만 그게 그렇게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님을 알았다. 나도 모르게 그만 숨이 터져 나와 버리는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웃음이 날 정도로 어리석은 짓이었지만 그 당시 나로서는 더할 수 없이 절박한 입장이었다. 별별 생각을 다 해보고 별 궁리를 다 짜내어 보아도 죽을 방법은 없고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이렇게 되살아났으니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김승일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 사람은 보통 때도 워낙 허약한 사람이어서 죽었을거야! ' 김승일이 죽었다고 생각하니 그가 부럽고, 나는 더욱 겁이 났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