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원 초대소, 열 한 번째-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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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원 초대소, 열 한 번째
금성정치군사대학을 졸업한 숙희와 나는 조선로동당 조사부 2과 소속인 동북리 9호 초대소로 옮겨졌다. 우리는 이곳에서 다시 재학습을 받았다. 일과표는 금성정치군사대학에서 생활하던 대로 시간표를 짰다.
학습 내용은 <김일성 저작선집>, <인민의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민족의 태양> 등의 서적을 교재로 정치사상을 재무장시켰다. 또 남조선 신문 동아일보를 읽으면서 남조선 정세를 익혔다. 한편 일본 소학교 1학년부터 6학년까지의 국어 교과서로 일본어를 자습했다.
또 ‘달매와 범달이', ‘조국으로 돌아온 관호의 일가'를 비롯한 북조선 영화와 ‘낙천적 비극' ,‘고난의 길'을 비롯한 쏘련 영화를 관람하며 공작원의 활동상을 학습키도 하였다. 영화는 주로 수요일이나 목요일에 관람했고 관람일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었다. 관람이 있는 날 아침에 전화로 초대소 식모에게 시간을 알리고 준비를 지시한다. 외출을 위한 위장차림을 준비한 후 예정된 시간에 지도원이 차를 타고 오면 함께 외출을 하였다. 가끔 영화를 관람한 후 시내 식당에서 외식을 할 때도 있었다.
오전 학습 시간은 자체 계획에 따라 정치학습 과제 연구를 발췌하거나 록음기로 외국어 학습을 했고, 오후에는 초대소 책장에 비치된 혁명소설들을 읽기도 하고 초대소 식모를 도와 채소와 강냉이 밭을 손질하기도 했다. 쉴 새 없이 바빴지만 그래도 금성정치군사대학 시절의 생활과 비교하면 한없이 편안한 편이었다. 벽난로 불을 볼 일도, 토끼 사료를 줄 일도 없다는 것만이 다행스러웠다.
저녁 6시경은 격술장에서 운동 및 격술 동작을 연습하여 이미 익힌 격술이 퇴보되지 않도록 계속적인 단련을 쌓았다. 매주 토요일 저녁 7시부터 텔레비죤에서 외국 영화를 방영하기 때문에 초대소 식모와 함께 텔레비죤을 시청하면서 보냈다. 4km 야간 산악행군을 하지 않는 것은 식모가 묵인해 주면 그만이었다. 일요일은 그야말로 휴식의 날이었다. 아침 10시부터 텔레비죤을 시청하거나 자유롭게 자기 일을 할 수 있었다.
약 3개월간 동북리 9호 초대소에서 이처럼 복습을 하고 있던 중, 정 지도원이 리명길 지도원으로 교체되었다. 공작원과 지도원은 언제 어디서나 만났다가 헤어지는 것이지만 정 지도원은 처음에 나를 사회에서 초대소로 안내 맡았던 사람이라 그런지 몹시 서운하게 느껴졌다.
1981년 7월 초. 리 지도원은 숙희와 나에게 지시를 내렸다.
“동무들은 혁명 임무가 각기 다르기 때문에 오늘부터 헤어져 공부를 해야 하오. 그래서 옥화 동무는 다른 초대소로 이동하게 되었으니 오늘 저녁 6시에 출발할 수 있도록 짐을 꾸리시오.”
우리는 1년동안 동고동락하며 정이 들었지만 항상 헤어질 준비는 되여 있었다. 공작원들은 헤어지는 것에 대하여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같이 교육받다가 그 과정이 끝나가면 벌써 곧 헤어지겠거니 하는 마음을 갖는다. 헤어질 순간이 다가오는 것을 예감하면서도 다음에 새롭게 전개될 공작 임무에 대한 기대감으로 그렇게 애석하게 생각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나는 숙희의 전송을 받으며 리 지도원을 따라 나섰다. 차가 석양이 깃든 농저저수지를 끼고 돌아 그 부근에 있는 동북리 2층 3호 초대소에 도착했다. 이 특각 초대소는 9호 초대소와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지만 이전 장소의 위치에 대한 보안을 위해 벤즈 차를 타고 그 부근을 빙빙 돌았다. 사실 나는 당시 그 부근 지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동차로 쓸데없이 빙빙 돌다 보니 지리를 더 잘 알게 되었다. 결국 보안을 한다는 일이 비밀을 더 드러낸 결과를 초래했지만 나는 모른 척하고 있었다. 나는 특각 3호 초대소에서 1981년 7월 4일부터 1983년 3월까지 20개월간을 수용되어 살았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