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원 초대소, 열 두 번째-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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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원 초대소, 열 두 번째
차가 초대소 마당에 멈춰서자 미리 련락이 되어 있었던 모양으로 초대소 아주머니와 멋쟁이 여자가 반갑게 달려 나왔다. 멋쟁이 여자는 북조선에서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대단히 멋을 내고 있었으며, 리 지도원에게 인사를 하면서 나를 힐끗힐끗 훔쳐보았다.
며칠 전부터 리 지도원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 대충 짐작은 했으나 첫 보기에도 북조선 여성들과는 완연하게 달랐고 온몸에서 외국여자 티가 확 풍겼다.
키는 166cm 정도로 크고 입과 눈도 큼직큼직했고 서구적인 인상이었다. 그녀는 그 당시 북조선 여성들에게 선망의 대상품인 엷고 하늘하늘한 나일론 조세트 천의 살색 브라우스와 곤색의 긴 스카트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긴 파마머리에 화장도 짙었다.
나는 그때 그런 화장을 처음 보았다. 분 바르고 눈썹과 입술을 그리고 볼연지를 바르는 것이 화장의 전부인 줄 알았는데 눈에 아이사도를 칠하는 것은 전혀 몰랐었다. 눈가를 시퍼렇게 칠하고 눈두덩이를 번적거리게 바른 것이 참 이상했다. 그야말로 외계인을 만 난 것같이 신기로웠다. 마당에서는 간단히 인사만 하고 응접실로 들어와 지도원은 다시 소개를 시켰다.
“이쪽은 옥화 동무에게 일본말을 가르칠 리은혜 선생이오. 앞으로 열심히 일본어를 배우시오.”
은혜 선생은 그동안 혼자 있기가 지겨웠는지,
“이제는 옥화 동무와 같이 있게 되어서 좋아요. 걱정마십시오. 제가 책임지고 잘 가르치겠습니다.”
하며 좋아했다. 그녀의 조선말은 일어식 발음으로 매우 어색했지만 귀여운 데가 있었다. 나도 대학에서 배운 일어 실력이 있어 지도원의 권유에 따라,
“요로시구 오네가이시마스.”
하고 어색한 일본말로 인사를 던졌다.
은혜 선생은 리 지도원과 대화를 나눌 때마다 조선말로 붙임성 있게 말했지만 말이 서툴러 혀 짧은 소리를 하면서 같은 말을 몇 번씩 되풀이하곤 한다. 조선말로 의사소통을 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했다. 그녀는 일본에서 랍치되여 온 일본 여자였다. 김일성에게 은혜를 입었다 하여 리은혜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리 지도원은 나와 은혜 선생에게 여러 가지 주의사항을 전달했다.
‘일과표에 따라 학습을 진행할 것' ‘은혜 선생과 옥화선생은 지금 이 시간부터 모든 대화를 일본어로만 사용하고 조선말은 일체 사용하지 말 것' ‘옥화 선생은 은혜 선생으로부터 일본의 언어뿐 아니라 몸짓, 풍습, 화장법과 사고방식까지 익혀 완전한 일본인처럼 될 수 있도록 학습할 것' 그의 지시 내용은 나를 철두철미한 일본인화 시키라는 것이었다.
첫날은 정해진 방 정리를 하면서 보냈다. 나는 1층, 은혜는 2층 침실을 사용하고 학습은 2층 학습실에서 하기로 되었다.
다음 날은 은혜의 생일이어서 특별한 강의 없이 지나갔다. 저녁에는 은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특별 음식상이 준비되었고 부부장, 과장도 참석하여 동석식사를 했다. 명색이 은혜 선생의 생일 축하 연회였다.
일본어 학습은 은혜의 생일 다음 날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은혜와 일상생활에서 일본어로만 대화하자니까 일주일간은 쑥쓰러워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으나 은혜의 말은 다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