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e use cookies to help make LingQ better. By visiting the site, you agree to our cookie policy.


image

김현희의 고백 (Kim Hyun-hee's confession), 공작원 초대소, 스물 일곱 번째-72

공작원 초대소, 스물 일곱 번째-72

[...]

공작원 초대소, 스물 일곱 번째

‘태월춘'이라는 초대소 식모는 모두 일본 제품으로 된 각종 공작 장비품을 보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특히 세이꼬 시계를 몹시 부러워했다. 몇 년 전 아들이 돈 200원을 부치면서 그래도 어머니가 중앙당에 있으니 시계 좀 사달라고 부탁해 왔는데 아직도 살 가망이 없다는 푸념도 늘어놓았다.

나는 그런 식모에게 무엇 하나라도 주고 싶었지만 소비용 ‘삼푸', ‘비누' 를 제외한 모든 장비품은 복귀한 후 다시 품목별로 반환해야 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임무 수행이 잘 되여 영웅 칭호를 받은 경우라면 당에서 큰 선심으로 장비품들을 그래도 반환시키지 않고 쓰게 한다는 말이 있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인가.

초대소로 다니다 나면 가끔 친어머니처럼 정이 드는 초대소 식모가 있다. 내게는 ‘태월춘'이 바로 그런 사람이였다. 그 어머니는 함경도 출신으로 내가 떠나던 당시 환갑을 1년 앞두고 있는 할머니였다. 남편은 전쟁 시기에 죽어 24살에 청상과부가 되였다 한다. 슬하에 1남 1녀와 시어머니를 부양하느라고 밭일, 남의 집 일 등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억척스럽게 일했지만 끼니조차 이을 수가 없었다. 너무 급박해지자 피를 뽑아 팔아가면서까지 식량을 마련하기도 하다가 쓰러지기도 여러 번 했었다. 그녀는 험난한 고생을 하면서도 무슨 일이건 열성적으로 했기 때문에 동네에서 녀맹위원장도 시켰다. 그러다가 1970년경에 초대소 식모로 오게 되였다 한다.

초대소 생활을 시작하면서 잘 먹고 마음이 편해져서 그런지 1984년도에 내가 처음 그를 보았을 때 나이에 비해 아주 젊어보였다. 얼굴이 통통하고 피부도 희고 윤기가 돌았으며 옷도 깨끗이 입고 있어 나는 그녀가 40대 중후반인 줄 알았다. 그때 초대소 어머니는 50이 훨씬 넘은 나이였다. 이 어머니는 인정 많고 요리솜씨가 좋은 데다 한시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일을 해댔다. 또 만나는 사람마다에게 온갖 정성을 다하고 자기 식구 대하듯 정을 쏟다나니까 공작원들은 누구나 어머니를 좋아하고 따랐다.

이 어머니의 딸은 김책시에 시집가 살고 있고 아들은 안전원으로 있는데 지방으로만 다니면서 고생을 많이 해 어머니가 간부들에게 부탁하여 평양으로 조동시켰다. 조그마한 집도 하나 배정받아 살게 되였다. 그런데 1985년경에 아들이 결혼식집에 갔다가 술을 마시고 돌아와 잠을 자다가 심장마비로 죽었다 한다.

초대소 어머니는 “남편이 죽을 때는 그래도 앞 산이 보였는데 아들이 죽었을 때는 앞이 캄캄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더라.”며 아들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표현했다.

1984년도에 만났을 때는 통통하던 얼굴이 그 사이에 여위여 주름이 많이 생겨 있었다. 나를 친딸처럼 대해 주던 초대소 어머니는 측은하다는 표정으로 내 얼굴을 들여다보는 적이 많았다.

임무 준비 기간 중 잠자리에 누우면 첫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을까 념려와 걱정이 앞섰다. 첫 외국 려행에 대한 기대와 불안감으로 아무리 꼼꼼히 챙기고 준비해도 무엇인가가 부족한 것 같은 느낌이여서 짐을 몇 번씩 풀어 다시 싸고 제대로 잠을 들기가 어려웠다.

시간은 어느새 흘러 떠날 날이 가까워졌다. 평양을 출발하기 이틀 전에는 담당인 장 부부장으로부터 려행 준비사항에 대한 검열을 받았다.

‘행동 로정에 대하여 완전하게 기억하고 있는가? ' ‘장비들은 다 준비되여 있는가? ' ‘옥화 동무는 빠리에서 마카오까지 혼자 행동하게 되는데 자신이 있는가? ' ‘해외 실습은 처음이니 단독 행동하는 동안 각별히 주의하라!' 그는 검열 끝에 몇 가지 주의사항을 늘어놓았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


공작원 초대소, 스물 일곱 번째-72 Einladung zum Pfau, siebenundzwanzigste - 72 Приглашение герцога, двадцать седьмое - 72

[...]

공작원 초대소, 스물 일곱 번째

‘태월춘'이라는 초대소 식모는 모두 일본 제품으로 된 각종 공작 장비품을 보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The super small staff of 'Taewolchun' was amazed when they saw all kinds of machine tools made in Japan. 太月春」という招待客の食母は、すべて日本製品である各種工作用具を見て驚きを隠せませんでした。 특히 세이꼬 시계를 몹시 부러워했다. 몇 년 전 아들이 돈 200원을 부치면서 그래도 어머니가 중앙당에 있으니 시계 좀 사달라고 부탁해 왔는데 아직도 살 가망이 없다는 푸념도 늘어놓았다. A few years ago, when his son paid 200 won, he still asked his mother to buy a watch because he was in the central hall. 数年前、息子が200ウォンを渡して、それでも母が中央堂にいるから時計を買ってほしいと頼んできたが、まだ買えないと愚痴をこぼした。

나는 그런 식모에게 무엇 하나라도 주고 싶었지만 소비용 ‘삼푸', ‘비누' 를 제외한 모든 장비품은 복귀한 후 다시 품목별로 반환해야 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I wanted to give anything to such a mother-in-law, but I couldn't because I had to return all items of equipment except for 'Sampu' and 'Soap' for consumption. 私はそんな食母に何か一つでも渡したかったのですが、消費用の「サンフ」、「石鹸」を除くすべての備品は、帰国後、また品目ごとに返却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それもできませんでした。 임무 수행이 잘 되여 영웅 칭호를 받은 경우라면 당에서 큰 선심으로 장비품들을 그래도 반환시키지 않고 쓰게 한다는 말이 있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인가. If you've been given the title of a hero because you've done well, there's a saying in the party that you can use the equipment with great care, without returning it, but is that easy? 任務遂行がうまくいって英雄の称号をもらった場合、党の大盤振る舞いで装備品をそれでも返却せずに使わせるという話もありますが、そんなに簡単なことなのでしょうか。

초대소로 다니다 나면 가끔 친어머니처럼 정이 드는 초대소 식모가 있다. 草庵に通っていると、たまに実母のように親しみを感じる草庵の女将がいる。 내게는 ‘태월춘'이 바로 그런 사람이였다. For me, 'Taewolchun' was such a person. 그 어머니는 함경도 출신으로 내가 떠나던 당시 환갑을 1년 앞두고 있는 할머니였다. The mother was from Hamgyeong-do and was a grandmother who was about six years ahead of the 60th birthday when I left. その母親は咸鏡島出身で、私が出発した当時、還暦を1年後に控えたおばあちゃんだった。 남편은 전쟁 시기에 죽어 24살에 청상과부가 되였다 한다. 夫は戦時中に亡くなり、24歳で青年の妻になったそうです。 슬하에 1남 1녀와 시어머니를 부양하느라고 밭일, 남의 집 일 등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억척스럽게 일했지만 끼니조차 이을 수가 없었다. 1男1女と義母を扶養するため、畑仕事、他人の家の仕事など、何でもかんでも無理矢理働いたが、食事もままならなかった。 너무 급박해지자 피를 뽑아 팔아가면서까지 식량을 마련하기도 하다가 쓰러지기도 여러 번 했었다. When it became too urgent, he pulled out blood and sold it to prepare food, and he collapsed several times. あまりに切羽詰まったので、血を抜いて売ってまで食料を調達したり、何度も倒れたこともあった。 그녀는 험난한 고생을 하면서도 무슨 일이건 열성적으로 했기 때문에 동네에서 녀맹위원장도 시켰다. 彼女は大変な苦労をしながらも何事にも熱心に取り組んだので、町内会の女性委員長も任命した。 그러다가 1970년경에 초대소 식모로 오게 되였다 한다.

초대소 생활을 시작하면서 잘 먹고 마음이 편해져서 그런지 1984년도에 내가 처음 그를 보았을 때 나이에 비해 아주 젊어보였다. When I first started seeing him in 1984, when I first saw him in 1984, he seemed very young compared to his age. 超小屋暮らしを始めて、よく食べ、気楽になったせいか、1984年に私が初めて彼を見たとき、年齢に対してとても若く見えた。 얼굴이 통통하고 피부도 희고 윤기가 돌았으며 옷도 깨끗이 입고 있어 나는 그녀가 40대 중후반인 줄 알았다. Her face was plump, her skin was white, she was shiny, and her clothes were clean, so I thought she was in her late 40s. 顔はふっくらとしていて、肌は白くツヤがあり、服装も清潔感があり、私は彼女が40代半ばから後半だと思った。 그때 초대소 어머니는 50이 훨씬 넘은 나이였다. その時、初代母は50歳を 훌쩍超えた年齢だった。 이 어머니는 인정 많고 요리솜씨가 좋은 데다 한시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일을 해댔다. このお母さんは人当たりがよく、料理も上手で、休む暇もなくひたすら働いていた。 또 만나는 사람마다에게 온갖 정성을 다하고 자기 식구 대하듯 정을 쏟다나니까 공작원들은 누구나 어머니를 좋아하고 따랐다. In addition, every person who met meets all kinds of sincerity and devotes himself as if he treats his family. また、会う人一人一人に心を尽くし、自分の家族に接するように愛情を注ぐので、工作員は皆、母親を慕って従った。

이 어머니의 딸은 김책시에 시집가 살고 있고 아들은 안전원으로 있는데 지방으로만 다니면서 고생을 많이 해 어머니가 간부들에게 부탁하여 평양으로 조동시켰다. この母親の娘は金甫市に嫁いで住んでいて、息子は安全院にいるのですが、地方にしか行けず苦労が多く、母親が幹部に頼んで平壌に移送させました。 조그마한 집도 하나 배정받아 살게 되였다. Even a small house was assigned to live. 小さな一軒家も割り当てられ、住むことになった。 그런데 1985년경에 아들이 결혼식집에 갔다가 술을 마시고 돌아와 잠을 자다가 심장마비로 죽었다 한다. ところが、1985年頃、息子が結婚式に行った後、お酒を飲んで帰ってきて寝ている間に心臓発作で亡くなったという。

초대소 어머니는 “남편이 죽을 때는 그래도 앞 산이 보였는데 아들이 죽었을 때는 앞이 캄캄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더라.”며 아들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표현했다. 曾祖母は「夫が亡くなった時はまだ目の前の山が見えたが、息子が亡くなった時は前が真っ暗で何も見えなかった」と息子の死に対する悲しみを表現した。

1984년도에 만났을 때는 통통하던 얼굴이 그 사이에 여위여 주름이 많이 생겨 있었다. 1984年に会ったときはふっくらしていた顔が、その間に痩せてシワが多くなっていた。 나를 친딸처럼 대해 주던 초대소 어머니는 측은하다는 표정으로 내 얼굴을 들여다보는 적이 많았다. 私を実の娘のように接してくれた招待所の母は、同情の表情で私の顔を覗き込むことが多かった。

임무 준비 기간 중 잠자리에 누우면 첫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을까 념려와 걱정이 앞섰다. ミッションの準備期間中、ベッドに横たわると、最初のミッションをうまくこなせるか心配になり、不安が先行しました。 첫 외국 려행에 대한 기대와 불안감으로 아무리 꼼꼼히 챙기고 준비해도 무엇인가가 부족한 것 같은 느낌이여서 짐을 몇 번씩 풀어 다시 싸고 제대로 잠을 들기가 어려웠다. 初めての海外旅行への期待と不安で、どんなに念入りに準備していても何かが足りないような気がして、何度も荷物を解き直し、荷物を詰め直し、なかなか眠りにつくことができませんでした。

시간은 어느새 흘러 떠날 날이 가까워졌다. あっという間に時間が経ち、出発の日が近づいてきました。 평양을 출발하기 이틀 전에는 담당인 장 부부장으로부터 려행 준비사항에 대한 검열을 받았다. Two days prior to departure from Pyongyang, he was inspected by the chief, Jang, Jang, who was in charge of the preparations.

‘행동 로정에 대하여 완전하게 기억하고 있는가? 行動ロジックについて完全に記憶しているか? '  ‘장비들은 다 준비되여 있는가? ' '機材は揃っているか? '  ‘옥화 동무는 빠리에서 마카오까지 혼자 행동하게 되는데 자신이 있는가? '' Okhwa comrades act alone from Pari to Macau. Are you confident? '  ‘해외 실습은 처음이니 단독 행동하는 동안 각별히 주의하라!' '' Because this is my first time practicing abroad, take special care while acting alone! ' 그는 검열 끝에 몇 가지 주의사항을 늘어놓았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