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원 초대소, 스물 한 번째-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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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원 초대소, 스물 한 번째
로동당에 입당하고 나서 다시 동북리 특각 3호 초대소로 돌아와 은혜와의 학습을 계속하였다.
은혜는 몸 전체에 잔털이 많아 가끔 얼굴을 면도했다. 내가 “여자가 왜 얼굴 면도를 하느냐”고 물으면 일본인이나 서양 여자들은 솜털이 많아서 대부분 면도를 하는 편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녀는 담배를 하루에 1갑 정도를 피웠는데 조선제 ‘백마' 나 ‘영광' 을 주로 피우며 외화상점에서 가금 영국제 ‘단힐'을 사다 피웠다. 은혜가 외국인 신분이어서 그런지 깊은 정은 주지 않았지만 1 년 8개월 동안 그녀와 침식을 같이 하다나니 알게 모르게 옅은 정이 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녀로부터 일본인화 교육을 받는 동안 5시간 이상 잠을 자 본 적이 없고 오침도 하지 않고 열심이었다. 은혜도 나도 함께 애썼던 결과 교육평가도 매우 만족스러웠다.
어느 덧 은혜와 작별할 시간이 가까워졌다. 나보다도 오히려 은혜가 더 서운해 했다.
그녀는 자기보다 어린 나지만 그동안 언니처럼 대해주어서 내게 고맙다고 말하며 자신이 아끼던 금촉이 달린 빨간색 만년필을 기념물로 주었다. 나는 그녀에게 보자기겸용 머리수건을 선사했다.
1983년 3월 중순. 리명길 지도원이 “오늘부터 리은혜 선생과 헤어져 다른 초대소로 가야하니 짐을 꾸리시오.” 라고 지시를 내렸다.
우리는 예상했던 대로 작별의 시간을 맞았다. 은혜는 초대소 문 앞에 서서 우리가 탄 벤즈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내가 선물한 머리수건을 흔들었다. 오랫동안 같이 생활하면서 느끼지 못했는데 머리수건을 흔들어대는 은혜의 모습을 보니 새삼스럽게 애틋한 정이 느껴졌다.
‘리은혜 선생, 안녕!' 나는 마음으로 인사를 보냈다.
내가 옮겨간 초대소는 룡성 40호 초대소였다. 평양에서 평성시로 가는 포장도로 좌측에 룡성 시내가 있고 오른쪽으로 룡성 시내 종점이 있으며 그 맞은편에 합장강 다리가 있는데 자동차는 그 다리를 건너갔다. 농로를 따라가서 룡궁 마을을 지나 약 1km쯤 가니 기역자 모양의 단층집이 나타났다. 이 초대소가 바로 룡성 40호 초대소였다.
룡성 40호 초대소 건물은 세멘트 벽돌로 지은 낡은 집이었다. 침실, 학습실, 주방, 지도원 방 , 식모 방 등이 동북리 단층 초대소와 비슷했다. 차가 초대소 마당에 들어서자 숙희와 초대소 식모가 마중나와 있다가 반겨주었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숙희는 나를 반겨 주면서도 한편으로는 몹시 언짢은 표정으로 풀이 죽어있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내가 일본인화 교육을 받고 개선장군처럼 나타났는데 자신은 그동안 금성정치군사대학에서 배웠던 정치사상에 관한 과목을 지루하게 학습했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존심이 상해 있었다고 했다.
숙희와 나는 다시 배합되어 전과 똑같은 훈련을 받았다. 정치사상 학습, 정보리론 학습, 영화 관람과 관광 등은 종전과 같았으나 이번에는 실무 실습훈련을 많이 받았다.
‘무전실습'으로는 매일 오후 3시나 밤 9시, 자정과 같은 시간에 지정된 주파수를 맞추어 라리오 방송을 들어서 전신 부호 수신 능력을 배양했다. 교육결과 1분에 전신 부호 20조를 수신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웠다.
‘실탄사격'은 권총과 자동보총을 주로 다루었는데 권총은 실탄 40발씩 월 2회 사격하고 자동보총은 3개월에 한 번씩 15발을 사격했다. 그 결과 나는 사격에서 약 90%이상을 명중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