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원 초대소, 스물 두번째-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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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원 초대소, 스물 두번째
룡성 40호 초대소로 옮겨진 이후 나는 실무 실습훈련을 많이 받았다.
나는 실탄사격에서 약 90%이상을 명중시킬 수 있는 능력 을 갖추게 되었다. ‘산악행군' 은 10kg의 배낭을 지고 매일 저녁 20리, 매주 토요일 50~100리, 김일성 생일을 기념해서 415리를 행군했다. 또 2개월간 매일 4시간씩 볼가 승용차를 가지고 운전교육을 했다. 곡선인 시골길을 주행하다가 시내로 나갔다. 북조선에서는 시내에 차가 별로 없어 앞만 잘 보고 달리면 된다. 그리고 매일 1시간씩 자전거 타기 실습도 했으며 평양 방직 공장에 가서 여공들의 작업 장면을 촬영하면서 사진 실습도 했다.
‘수영'은 원산해수욕장과 남포해수욕장에 가서 했으며 매일 30분씩 금성정치군사대학에서 배웠던 격술 동작을 익히고, 예전대로 새끼줄 같은 기둥을 주먹으로 쳐서 주먹다지기도 하였다. 그중 가장 힘든 것은 ‘비밀아지트 굴설'이었다. 지도원은 우리에게 담력을 키운다는 구실로 일부러 비오는 날을 택해 ‘비밀아지트 굴설' 훈련을 시켰는데 비오는 한밤중에 아무도 없는 깊은 산속에서 땅을 파고 그 속에 들어가 밤을 지새웠다. 작은 공병삽으로 자기가 들어가 앉아 있을 자리를 파고 거기서 나온 흙은 보자기에 싸서 멀리 버려 그 흔적을 없앴다. 그 훈련은 지금 생각해도 몸서리 칠 정도로 무섭고 힘들었다.
원산으로 ‘수영' 훈련을 갈 때도 공작원의 자력갱생 훈련까지 겸해서 하기로 하고 나 혼자 렬차 편으로 평양을 출발했다. 단독으로 원산해수욕장에 가서 스스로 침식을 해결하면서 수영훈련을 하다가 3일 후 다시 렬차 편으로 평양에 복귀하는 훈련이었다.
나는 렬차 안에서 내내 원산에 가면 어떻게 침식을 해결할까 하는 궁리만 했다. 원산역에 도착해 보니 역에는 지도원과 과장이 마중나와 있었다. 어찌된 영문인 줄을 몰라 고민하던 차에 의지할 사람들을 만나니 반가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옥화 동무를 혼자 떠나보내고 우리는 자동차로 왔소. 원산은 외국에서 오는 사람이 많아 망나니가 들끓고 여자들이 밤에 혼자 다닐 수 없는 곳이오. 옥화동무를 이곳에서 혼자 다니게 한다는 건 위험할 것 같아 우리가 왔소.”
과장의 설명을 듣고 나는 반가움과 동시에 그들의 세심한 배려에 새삼 감사한 마음을 가졌다.
룡성 40호에서 1년 5개월간 받은 훈련은 금성정치군사대학에서 받던 훈련보다 더 고되고 힘에 겨웠다.
그 힘든 중에서도 1984년도 김일성 생일을 맞아 2박 3일간의 휴가가 내려졌던 일은 잊을 수가 없다. 휴가 떠나기 이틀 전 리 지도원이 나에게 귀띔해 준 그 말, 나는 정말 꿈만 같았다.
“옥화 동무, 집에 가보고 싶소? 집도 이사했다니 한 번 가봐야 되겠지. 이번 4.15명절날 다녀오시오.”
“그것이 정말입니까?” 하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기어 나왔지만 꿀꺽 침을 삼켰다. 혁명전사가 될 공작원이 너무 사사로운 일에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옳지 않은 것 같아서였다.
거의 매일 밤 꿈에서 가족을 만나기도 하고 날씨가 궂은 날이거나 몸이 아플 때 더욱 그립고 가보고 싶던 집이었다. 그럴 때마다 ‘이제 집에는 갈 수 없겠지. 조국 통일을 위해 바친 몸이니 할 수 없는 일이지. 혁명하겠다는 내가 작은 개인 일에 신경을 쓰면 안되지' 하고 자위하며 자포자기하던 터였다. 그런데 꿈에도 생각지 못한 휴가를 가라고 하니 내 몸이 갑자기 하늘로 부웅 떠올라 날아오르는 기분이었다. 가슴이 떨리고 손발이 떨리고 나중에는 온몸이 다 떨리는 설레임으로 아무 일손도 잡을 수가 없었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