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원 초대소, 스물 아홉 번째-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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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원 초대소, 스물 아홉 번째
정 지도원의 딸인 향희는 나를 친언니처럼 따라다녔다. 또 김일성이 구라파 려행 중 웽그리아를 방문했을 때 대사 딸과 자신 중에서 대사 딸이 자기보다 좀 더 이뻐서 김일성에게 꽃다발을 주었다며 두고두고 이야기하기도 하였다.
그 곳 날씨는 맑고 땀이 날 정도로 더웠다.
공항에서 대기하고 있던 부다빼스뜨 주재 정 지도원의 안내로 다뉴브강 사자다리를 건너 승용차 편으로 20여부 거리의 주택가에 위치한 2층집 초대소에 도착해 려장을 풀고 4박 5일간 체류하였다. ‘영웅광장', ‘박물관', ‘렬사묘', ‘부다의 궁전', ‘백화점' 및 ‘보석점', ‘안경점' 등 시내 중심가를 관광하며 시간을 보냈다. 정 지도원과 장 지도원, 김승일은 자본주의 국가로 넘어가기 위한 준비를 시작 했다. 여기에서 가장 문제되는 것을 오지리 국경을 어떻게 통과하느냐 하는 것 이였다.
쏘련, 웽그리아 등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북조선 공무 려권을 사용해 왔지만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일본 려권을 사용하여야 하는데 웽그리아 국경을 넘기 전 출국 심사 때는 북조선 공무 려권을 보여야 하고 , 오지리 국경 초소를 통화할 때는 일본 려권을 보여야 하니 애로사항이 따랐다. 항공기는 아예 이용할 수 없고 렬차를 리용하느냐 아니면 자동차를 리용하느냐 하는 국경 통과 방법에 토론이 분분했다.
우리는 그곳 사정에 밝은 부다빼스뜨 주재 정 지도원의 의견에 따라 렬차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비엔나행 국제 열차는 부다빼스뜨역에서 오전 11시에 있었다. 우리는 완전히 별실로 된 특별 가족칸을 리용했다. 오지리로 넘어가는 국경 부근의 역에서 우리는 북조선 공무 려권에 출국 사열을 받은 뒤 동행하던 장 지도원에게 반납하고 준비했던 일본 려권을 받았다.
오지리 출입국 관리소의 입국 심사는 조마조마하게 생각하던 것과는 달리 형식적인 절차만 거칠 뿐 그다지 까다롭지 않아 싱거울 정도로 쉽게 끝났다.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이 터지고 앉은 좌석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처음으로 바깥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창 밖으로 검게 빛나는 비옥한 밭이 끝없이 지나갔다. 따뜻한 느낌이 드는 풍경이였다.
렬차는 4시간정도 달리다가 비엔나 서역에 도착하였다. 도착 즉시 역 구내에 있는 관광 안내소를 찾아가 아스토리아 호텔을 예약한 뒤 지금까지 동행하던 장 지도원과 헤여졌다.
장 지도원은 김 선생과 나에게, “이제부터 나는 이곳 공화국 대사관에 가 있을 테니 련락할 일이 생기면 대사관으로 전화하시오. 전화할 때는 영어로 장선생을 찾으면 나와 연락될 것이요. 앞으로 두 선생들은 일본인 부녀 관광객으로 위장하여 행동해야 하니 실수 없이 잘 하기 바라오.” 하며 다시 한번 주의를 당부하고 비엔나 주재 북조선 대사관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그는 다음 날 오전 10시, 오스트리아 려행사 앞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먼저 자리를 떴다. 장 지도원과 헤여진 김승일과 나는 이제 일본인 부녀 관광객이 되여 자본주의 국가에의 첫발을 내디녀야만 했다. 내 생전 처음으로 만난 비엔나의 거리는 단지 내게는 긴장되고 조심스러운 이국의 낯선 거리일 뿐 색다른 감명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일본인 부녀 관광객인 우리 부녀는 비엔나 서역에서 택시를 탔다.
“아스토리아호테르.”
우리는 택시 안에서도 관광객답게 시가지를 주시하면서 간간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누가 봐도 다정한 부녀 사이였다. 물론 우리는 일본 말을 능숙하게 구사했다. 택시가 호텔 앞에 멎어 내릴 때는 운전수에게 택시 요금 외에 팁을 주는 일도 잊지 않았다.
태어나서 생전 처음 해보는 행동이지만 나는 태연하게 잘 해내었고 김선생님도 노련하게 잘 받아주었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