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원 초대소, 서른 여섯 번째-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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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원 초대소, 서른 여섯 번째
우리는 북경 주재 북조선 대사관 안에 있는 초대소에서 이틀을 보낸 뒤 북경을 떠나 평양 귀환길에 올랐다.
10월 2일 저녁 6시쯤 우리 일행은 평양 순안 비행장에 도착했다. 평양을 떠난지 47일 만이였다. 새삼 내 고향을 대하는 감회가 새로웠다. 최 부부장과 최 부과장이 우리를 마중나와 있었다. 공항 귀빈실로 들어가 잠깐 휴식하는 동안 최 부과장이 조용히 나를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옥화동무, 이번 구라파에 첫 해외려행을 한 감상이 어떻소?”
그는 내가 미처 대답할 겨를도 주지 않고 자기가 할 말만 계속했다.
“아마 많은 걸 보고 많은 걸 느꼈으리라 생각하오. 이번 려행이 첫 려행이니만큼 할 말도 많겠지만 겉으로 본 것만을 가지고 말을 해서는 안되오. 자본주의 사회의 결점만을 생각하시오. 그러면 우리 사회주의 조선이 얼마나 행복한가를 다시 한번 느끼게 될거요.”
그는 필요 이상으로 말에 힘을 주었다. 강력한 의사를 표시하기 위해서인 듯이 보였다. 귀빈실 문 앞에 와서 그는 다시 한번 입조심 단단히 하라고 주의를 준다. 나는 최 부과장이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금방 알아들었다. 본 대로 말할 수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는데 부과장은 부과장대로 내가 녀자이기 때문에 걱정이 되였던 모양이다.
금성정치군사대학에서 훈련을 받을 때의 일인데 그때 시간이 지남에 따라 허물없이 친해진 교양 지도원은 우리에게 공작원의 뒷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었었다. 어느 공작원이 해외 려행 중 느낀 소감을 보고하는 자리에서 솔직하게 느낀 그대로를 보고했더니 그는 변질된 공작원으로 낙인 찍혀 떨어져 나갔다는 이야기와 뒷면 그 이야기를 알고 있어서 나는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참이였다.
동북리 2층 2호 초대소로 돌아오니 그동안 긴장했던 것이 풀리는지 피로가 엄습해 왔다. 침대에 누웠더니 침대가 가라앉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초저녁부터 잠에 빠져 버렸다. 다음 날 저녁 6시에는 부장이 와서 북경공항 면세점에서 사온 꼬냐크을 내놓고 동석식사를 했다.
“동무들이 무사히 돌아온 것을 축하하오. 옥화동무는 처음 해외실습이여서 단독 행동하는데 혹시 위험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했었는데 무사히 주어진 임무를 잘 수행하느라 수고했소.”
부장은 나를 격려해 주었다. 그리고 내가 목에 걸고 있는 십자가 목걸이를 보고 자본주의 국가에 돌아다니려면 좋은 위장 장비라고 추켜세웠다. 그 이후에는 이 목걸이에 대해 아무도 다른 의견을 내놓지 못했다.
그 다음 날부터는 김승일과 별도로 해외 려행 실습 결과에 대한 총화 보고서를 작성했다. ‘각 지역별 체류 기간', ‘해외 려행을 통해 일본인으로 위장하는 요령, 비행기 로선, 호텔, 편의시설 리용 방법, 체류한 도시의 지리와 풍습 등을 료해한 상태', ‘관광한 곳과 사용한 예산 명세서' 를 작성하고 자본주의 사회를 둘러보고 느낀 점을 써내려갔다. 총화보고서를 마치고 김승일과 나는 그동안 해외 려행 실습 과정에서 해이된 사상을 재무장하기 위하여 약 3개월간 자체적으로 정치사상 학습을 했다. 내 경우 사상이 해이해 졌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첫 해외 려행에의 감명이 쉽게 가시지 않아 정치 사상 학습에 더욱 열을 올렸다.
그 풍족하고 자유로운 생활과 그림처럼 아름답던 거리 거리의 모습이 나도 모르는 새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을 떨쳐 버리는데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