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원 초대소, 서른 일곱 번째-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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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원 초대소, 서른 일곱 번째
김승일과 다녀 온 해외려행 실습 결과에 대한 총화보고서를 작성했다. 내 경우 사상이 해이해졌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첫 해외려행에의 감명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내용은 대강 이러했다.
이번에 제가 실지 본 자본주의 사회는 교육 받은 대로 몇 명 안 되는 독점 자본가만이 살판치고 인민대중은 인간 이하의 착취를 당하는 비참한 지옥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네온싸인이 번쩍이고 사치품이 넘치는 호화로운 거리와 그것과는 정반대로 쓰러져가는 오막살이에서 끼니도 제대로 못 때우는 거지들이 우글거리는 어지럽고 불결한 뒷골목이었습니다.
인민의 피땀으로 살찐 자본가 놈들과 고위층만 드나드는 호화 식당과 서민들의 싸구려 음식점도 보았습니다. 인간보다 더 고급으로 치장한 애완용 개를 끌고 산책하는 부자들과 지하철 역내와 관광지마다 노래와 기타를 치며 한 푼 두 푼 구걸하는 거지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 사회주의 제도의 우월성을 다시 한 번 깊이 느꼈습니다.
그리고 위대한 수령님의 따뜻한 품속에서 그분의 현명한 령도 아래 누구나 다 같이 일하고 공부하고 병 치료받고 조금도 근심 걱정 없이 잘 사는 우리 조선의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게 되였습니다. 이런 훌륭한 우리 사회주의 제도를 원쑤들의 침해로부터 더욱 굳건히 지키기 위해 몸과 마음 다 바쳐 싸워야겠다는 각오를 더욱 굳게 다지게 되었습니다.
김승일 선생의 서울 침투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일본인 부녀 관광객으로 완벽하게 위장하였고, 건강 보장 문제는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 기간 중 특별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고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총화를 쓰면서 아름답던 거리 거리의 모습이 나도 모르는 새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을 떨쳐 버리는데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1985년 1월 초. 나는 김선생과 해여져 내가 소속된 2과로 돌아와서 룡성 5호 초대소에 수용되였다. 그리고약 6개월 동안 갈라져 있던 숙희와 다시 배합되여 함께 생활했다. 숙희는 그동안 중국어를 배우면서 계속 초대소에 수용되여 있었던 것 같았다.
숙희는 달라진 내 모습을 보면서 지난번 일본인화 교육을 받은 뒤 다시 만날 때 보이던 언짢은 표정보다 더 노골적으로 질투어린 시선을 보냈다. 일본어 교육을 받고 올 때는 내 화장이 좀 진해졌을 뿐이였는데 이번에는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금반지도 꼈으며 옷도 외제 옷으로 세련되게 입었으니 숙희도 내가 그동안 해외려행을 한 사실을 눈치 챘던 모양이다. 그러나 숙희는 속이 넓은 동무였기 때문에 그런 기색을 보인 것은 잠깐 이였고 나와 다시 만나게 된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며 반가워했다.
나는 숙희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고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까봐 해외려행에 대해 될수록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또 부과장의 입조심 하라는 당부도 있었기 때문이였다.
우리는 이곳에서 과거 중국 동북지방 할빈에 살다 온 표씨 성을 가진 60대 교포로부터 중국어 학습을 받았다. 표 선생은 키가 크고 몸집도 좋았으며 눈이 작아서 누가 봐도 중국사람 티가 났다.
내가 중국어 학습을 받게 된 것은 현 정세로 해외 공작원은 외국어를 2,3개 배워야 한다는 방침에 따라 교육을 실시하게 된 것이지만 해외려행 직후 부장에게 내가 했던 말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해외려행을 마치고 돌아와 부장과 동석식사를 할 때 부장이 해외에 나가서 가장 불편한 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때 나는 일어만으로는 말이 통하지 않아 다른 외국어도 배워야겠다고 대답했던 적이 있었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