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원 초대소, 서른 두 번째-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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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원 초대소, 서른 두 번째
쮸리히의 호텔은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아담하면서도 조용하고 아름다웠다. 정말 그림엽서에서나 봄직한 풍경이였다.
쮸리히에서 나흘 밤을 자면서 ‘쮸리히호', ‘알프스산' 등을 돌아보았다. 머리에 터번을 두르고 전통의상을 입은 인도인 관광객들이 알프스산의 눈을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만져도 보고 사진을 찍느라고 야단들이였다. 그들의 모습을 보니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 나라가 얼마나 살기 좋은 곳인가를 새삼 느꼈다.
우리는 택시를 대절하여 제네바로 갔다. 제네바는 쮸리히보다 약간 붐비기는 했지만 역시 깨끗하고 조용한 도시였다. 여기에서는 나흘 밤을 보냈는데 김승일은 금 도금 손목시계 하나를 샀다. 후에 집에 돌아가서 꺼내 놓으니 가족들은 그것을 제일 귀하게 여기더라는 것이였다.
북조선에서는 김일성의 명함시계를 받는 것이 최대 영광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명함 시계가 바로 오메가 시계였다. 제네바에 오니 거리 상점마다 즐비하게 늘어져 있는 것이 모두 오메가 시계여서 기분이 좀 이상스러웠다.
나도 시계 상점가에 가서 십자가 목걸이 하나를 구입했다. 내가 십자가 목걸이를 사서 목에 걸자 김승일은 얼굴을 찡그리며 로골적으로 싫어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때 나는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면서 단지 그 목걸이가 너무나 맘에 들어 김 선생의 눈총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걸고 다녔다.
스위스에서 보낸 날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떠날 때는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그만큼 스위스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아마도 환상적인 분위기에 매료된 것 같았다. 프랑스로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내가 스위스에서 너무 해이해졌는가 하여 다시 임무만을 생각하려고 애썼다. 빠리 드골 공항에 내릴 때쯤 겨우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공항 짐 검색대에서 검열을 받기 위해 약 30여명 되는 다른 일본인 남녀 관광객들 틈에 끼여 줄을 섰다. 짐 검색은 그저 대충대충 훑어보는 정도의 형식적인 것이였으므로 빠르게 진행되였다. 그런데 내 차례가 되자 짐을 열어 보라느니 어디서 오는 길이냐느니 하고 까다롭게 굴며 괜한 말을 걸어왔다. 말을 시키면서 옆의 직원들과 히죽이죽 웃는 등 장난기가 역력해 보였다. 속으로 화가 치밀었지만 화를 낼 수도 없어 시키는대로 트렁크에 열쇠를 꽂아 열려고 하자 다른 직원이 됐으니 그만두라고 만류하였다.
“마유미가 미인이니까 저 녀석들이 괜히 말 시키느라고 그래. 이럴 땐 오히려 미인이 불리해.”
김 선생은 화도 나고 긴장도 되여 있는 나를 안심시켰다. 그들의 장난기 섞인 짐 검색을 받을 때 나는 내가 위조된 일본 려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그들에게 대들고 싶었다. 공항 밖으로 나와 따뜻하고 높은 하늘이 있는 빠리의 가을 날씨를 대하고 나서야 겨우 기분이 풀렸다.
빠리에는 그랜드호텔에 투숙해서 4박 5일간 ‘개선문'과 ‘박물관', ‘베르사이유 궁전', ‘에펠탑' 등 유적지와 ‘상젤리제 거리', ‘드골 광장' 등 시내 중심가를 관광하고, 미장원에 들어가 머리를 숏 커트로 짧게 잘랐다. 북조선에서도 빠리는 모든 류행의 중심도시, 그리고 아름다운 도시로 알고 있다. 이러한 기대를 가지고 빠리에 도착하니 과연 빠리는 다른 도시, 국가와는 다른 데가 있었다. 각종 인구가 다 모인 곳처럼 복장에서부터 화장까지 각양 각색이였다. 특히 빨간 정장에 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 빨간 입술연지를 한 할머니들이 공원마다 앉아 책을 읽거나 산책을 하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였다. 또 평양의 천리마 거리나 비파 거리에 비해 어둡고 낡은 듯한 석조의 옛 건물들이 고풍스러우면서도 은은한 기품이 있었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