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원 초대소, 마흔 여섯번째-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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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원 초대소, 마흔 여섯번째
광주와 마카오에서 생활하면서 같은 중국 사람들이 들끓는 곳이지만 체제에 따라 사람들이 180도로 다르게 살아간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광주에서는 동무들에게 조선 여성의 인상을 좋게 남겨 놓고 떠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원래도 중국인들이 조선 여성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다고 동무들은 말해 주었었다.
“조선 여성들은 부지런하고 깨끗하고 머리 좋고 성실하다.”
남자들은 조선 여성과 결혼하고 싶다는 말까지 하며 호감을 보였지만 우리는 그들을 조금도 이성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들이 일반인과는 다른 인간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 혁명이 우선인 처지임을 항상 의식했다. 마카오에서는 친한 동무들을 사귀는 대신 숙희와 더욱 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타국에서 둘은 똘똘 뭉쳤던 것이다.
1987년 새해를 맞이하여 계획된 기간인 6개월이 다가오자 손 지도원이 와서 지시를 내렸다.
“1월 20일 까지 조국으로 돌아오라는 련락이 왔으니 1월 18일에 출발 할 수 있도록 준비하시오.”
이때부터 숙희와 나는 간부들에게 줄 선물 때문에 며칠을 토론하고 수십 번 씩 돈 계산을 맞춰보았다. 이 일은 해외려행에 한번 다녀온 내가 주도해서 진행했다. 결국 일제 고급 라이타 5개, 값싼 라이타 5개, 만년필 6개, 넥타이 2개를 구입하는데 그쳤다. 생활비와 용돈을 절약하여 모은 돈이 그것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귀국길에 광주에 잠깐 들러 박 지도원을 만났더니 그는 롱말로 “이제 다시 새장에 갇히게 됐군” 하며 웃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등에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내 자유로웠던 생활을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는데 평양으로 돌아가면 또 초대소 생활이 기다릴 것임을 잠시 잊었던 것이다.
평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숙희는 광주와 마카오에서의 자유로운 생활을 두고 떠나는 것을 못내 서운해 하며 그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내가 첫 해외려행에서 돌아와 부과장으로부터 주의 받던 내용을 숙희에게 그대로 말해 주었다.
“자본주의 사회를 겉으로만 보고 평가하지 말고 자본주의 사회의 결점만 생각해야 해. 입조심 단단히 하고.”
숙희는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떡거렸다.
1987년 1월20일 저녁 6시에 우리는 평양으로 돌아왔다. 비행장에는 리 지도원이 마중 나와 있었다. 리 지도원 역시 숙희에게 입조심 할 것을 당부했다. 숙희와 나는 룡성 43호 초대소에 수용되었다. 꿈에서 깨어 현실로 돌아온 듯한 심정이었다. 차라리 바깥 세상이 어떤지를 모르는 편이 살아가기에 편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가 초대소에 도착하여 옷을 갈아 입기 전에 리 지도원은
“그동안 수고 많았소. 곧 오 과장과 최 부부장이 나와서 작년 8.15에 수여된 조국해방 40돌 기념 메달을 수여하기로 되어 있으니 옷차림을 단정히 하고 수령님 초상휘장을 달고 대기하오.”하고 지시사항을 전달했다.
최 부부장과 오세영 과장이 도착하자 우리는 응접실에 걸려 있는 김일성 초상화를 향해 나란히 서서 최 부부장으로부터 ‘조국해방 40돌 기념 메달' 과 메달증을 수여받았다. 그리고 조장인 내가 대표로, “특별히 한 일도 없는 저희들에게 기념 메달까지 수여해 주신 당과 수령님의 정치적 신임과 배려에 충성으로 보답하겠습니다.”라고 결의를 밝혔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