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원 초대소, 마흔 네 번째-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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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원 초대소, 마흔 네 번째
그들이 쏟아 준 정에 비해 우리는 하나의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라는 압박감 때문에 가슴속 깊은 뜨거운 정을 마음껏 나누어 주지 못한 것이 항상 미안 했다.
같은 사회주의 체제라는 것 때문인지 서로 반발할 일도 없이 잘 통했다. 아마도 자본주의 사회의 동무들이었다면 가끔씩 언쟁이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은혜와 나처럼.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 인생 중 광주에서의 1년이 가장 자유롭고 즐거웠으며 행복한 때였던 것 같다. 그 동무들은 다 잘 있는지...그립기만 하다.
1986년 8월 18일. 숙희와 나는 마카오로 갔다. 마카오로 떠나기에 앞서 박 지도원과 함께 계획을 수립하고 여러 가지 준비를 갖추었다. 박 지도원은 본부에 있는 리명길 지도원의 편지를 받아 우리에게 전달했다. 모든 것은 박 지도원과 토로하고 지도를 받으시오. 이번 8월 중에 마카오로 이동해야 하며 마카오에 가서 생활하는 동안 에는 현지 실정에 맞게 옷차림이나 머리모양, 화장 등을 하여 철저히 신분 위장을 해야 하오. 언어는 위장된 신분에 맞도록 중어, 광동어, 또는 일본어 중 잘 택하여 사용하도록 하고 외출할 때는 언제든지 2명이 동행해야 하오. 외출시는 일본 려권을 소지하되 저녁 6시까지는 꼭 귀가토록 하고 귀가시에는 항시 경각심을 높여 미행하는 자가 있는가 확인해야 하오.
마카오에서 일본 려권을 가지고 있는 려행자는 입국 사증 없이 20일간씩 체류할 수 있으므로 그곳의 지도원과 토론하여 필요할 때 일본 려권에 입국 도장을 찍어서 사용할 수 있도록 도장을 동봉하오. 마카오에서 생활하는 동안 항상 출입문이나 창문을 꼭 잠그고 손님이 왔을 때는 누구인가를 확인하고 문을 열어주어야 하오.
생활 수칙이 적힌 편지였지만 멀리 있는 부모가 집 떠나 있는 딸에게 보내는 편지만큼이나 세세하게 걱정하고 있음이 역력했다. 중앙당에 소환되던 당시 ‘이제 딸은 우리가 책임지고 맡을 것이오' 라던 정 지도원의 이야기가 괜한 소리가 아니었음을 나는 가끔가끔 실감하는 일이 많았다. 그때마다 역시 신용 있고 신뢰할 수 있는 당에 감사를 드렸었다.
리명길 지도원은 편지와 함께 ‘하찌야 마유미 '명의의 내 일본 여권과 김숙희가 사용할 ‘다까하시 게이꼬' 명의의 일본 여권을 보내왔다. 여권에 마카오와 홍콩 출입 도장를 찍을 위조 마카오 입출국 고무도장 각 1조와 위조 홍콩 입출국 고무도장 각 1조를 동봉해 왔다. 박 지도원 역시 여러 가지 주의사항을 잔소리처럼 되풀이하며 늘어놓았다.
“마카오에 있는 손 지도원과 토로하여 두 동무들이 쓸 셋방을 구해 놓았으니 8.15조국 해방 기념일이 지난 다음 마카오로 떠날 준비를 하시오.”
그 이외에도 상세한 것들을 일러주었다. 즉, ‘광주에서 사귄 동무들에게는 조국에 돌아가게 되었다고 알려주어 정리할 것' ‘마카오에서는 손 지도원이 동무들의 생활을 돌보아 주겠지만 동무들 자신들이 자취하면서 생활해야 하기 때문에 특별히 주의해서 생활하고 사고 없이 잘 지내다가 돌아갈 것' ‘마카오 입출국 고무도장 사용 방법은 잘 모르겠지만 일본 여권은 입국사증 없이 마카오에 입국하여 20일간은 체류할 수 있으므로 손 지도원과 상의해서 필요한 때만 도장을 찍어 사용토록 할 것' 8월 18일 아침. 우리는 박창해 지도원이 손수 운전하는 승용차 편으로 광주를 출발하여 마카오로 향했다. 중국 국경 초소 앞에 차를 세우고 도보로 마카오 국경 초소를 통과하니 손 지도원이 마중나와 있었다. 우리는 택시를 잡아 타고 명주대 아파트로 갔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