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원 초대소, 마흔 일곱번째-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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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원 초대소, 마흔 일곱번째
마카오 생활을 접고 조선으로 들어오자 최 부부장과 오세영 과장이 ‘조국해방 40돌 기념 메달'과 메달증을 전달했다. 마카오의 자유로운 생활이 마치 꿈 같았다.
꿈같이 지나간 시간과 현실을 드나들며 총화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고통이었다. 한시바삐 잊고 현실에 적응해야 하는 우리로서는 어제의 기억을 되살린다는 일이 견디기 어려웠다. 두 사람 모두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나보다는 숙희가 더 못 견뎌 하는 것 같았다. 총화보고 모임이 끝나자 우리에게 2박 3일간의 휴가가 주어졌다. 어머니는 점점 변해 가는 딸의 모습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당시만 해도 조선에서는 여자의 화장이 짙지 않았는데 내 화장은 꽤 짙은 편이었다. 나는 은혜로부터 배운 일본식 화장법으로 화장을 했으며 더욱 세련되어 갔기 때문에 어머니 눈에는 낯설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어머니는 남자 앞에서 마구 웃지도 못하게 할 정도로 유난히 엄격한 분이었는데 몇 년만에 한 번씩 잠시 만나는 큰 딸을 꾸짖지도 못하고 속으로만 앓는 것이 분명했다. 어머니는 엄격하기도 하지만 억척스럽기도 했다. 남편과 자식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일도 마다않고 해내는 분이었다.
언젠가는 어머니가 아버지의 약을 한다면서 구렁이를 사온 적이 있었다. 아버지가 그때 과로로 몹시 피곤해 하였고 몸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어머니는 궁리 끝에 구렁이를 사왔던 것이다. 그것을 사와서 잡을 때 어머니는 놀라고 징그러워하고 무서워하면서도 참아냈다. 눈을 감고 토막을 칠 때는 정말 어머니가 남편을 생각하는 마음이 얼마나 큰지 알 것 같았다.
그런 마음은 아버지에게뿐 아니라 자식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큰딸인 나에게 쏟은 정성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영화 촬영 다니던 인민학교 시절에 어머니가 싸주었던 것들은 어머니의 정성이었다. 지방 촬영가서 풀어 보면 떡과 음식들이 꾸러미 꾸러미 들어 있었다. 이 음식들을 다른 배우들과 아무 생각 없이 나누어 먹곤 했는데 잘 산다는 귀국자들도 그렇게까지 싸오지 못해 내 것을 얻어먹을 정도였다. 또 내가 아침밥을 안 먹고 학교에 가면 동생을 업고 더운 밥을 싸가지고 학교로 오셨다.
“쉬는 시간에 얼른 먹어. 점심시간까지 굶으면 배고파 어쩌겠니?”
나는 그러는 어머니의 마음은 알지만 동무들 앞에 창피하여 ‘알았다' 며 얼른 밥을 받아들고 돌아서곤 했다. 더구나 꾸바에서 돌아오는 길에 모스크바에서 사온 털신은 잊을 수가 없다. 어머니는 모스크바에서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동안에도 내 발에 맞는 털신을 사가지고 왔다.
조선의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어머니는 겨울이 되자 자꾸 그 털신을 신기려 했는데 어린 마음에 나는 아무도 신지 않은 털신을 나 혼자 신는 것이 창피스러워 신지 않으려고 애썼다.
“이게 얼마나 귀한 건데 그러니?” 사실 다른 동무들은 쏘련제 털신은커녕 조선제 신발조차도 제때 구하기가 힘든 실정이었으며 없어서 못 신는 형편이었다. 그때 어머니는 안타깝게 신기려 하고 나는 안 신으려 하던 기억은 자라면서 내내 잊혀지지 않는 어머니의 사랑이였다. 사람들은 어머니더러 이악스럽다고들 했다. 억척스럽다는 뜻보다 조금 더 강한 표현인데 남편과 자식을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없는 분이 바로 내 어머니다. 그런 성격은 외갓집 내력인 것 같았다. 어머니는 외할아버지 성격을 그대로 닮은 것처럼 보였다.
외할아버지는 자신의 내복은 다 떨어져 기워 입으면서도 식구들 내복은 항상 최고로 사다 입혔다. 또 자신을 위해서 쓰는 용돈 한 푼은 부들부들 떠시면서도 처남에게 세 번씩이나 사업자금을 대 주었다. 할아버지는 처남이 세 번 다 사업을 망해먹고 났을 때도 집안 살림을 사는 집사로 채용하여 살 길을 마련해 주기도 하였다 한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