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원 초대소, 마흔 다섯번째-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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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원 초대소, 마흔 다섯번째
우리는 박창해 지도원이 손수 운전하는 승용차 편으로 광주를 출발하여 마카오로 향했다.
중국 국경 초소 앞에 차를 세우고 도보로 마카오 국경 초소를 통과하니 손 지도원이 마중나와 있었다. 택시를 잡아타고 명주대 아빠트로 갔는데, 우리 숙소는 이 아빠트 1동 3층 A 호실이었다. 명주대는 바다 쪽에 위치해 있는 조용하고 부자들이 많이 살고 있는 아빠트였다. 후에 둘이서 마카오 구석구석을 돌아다녀 보니 그 작은 섬 안에서도 정말 중국 대륙 초소 가까이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생활과 명주대 쪽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리고 광주에서는 보지 못하던 풍경도 보였다. 집집마다 문이 2층으로 되어 있고 거기에 철문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듣던 대로 강도, 살인이 범람하는 사회라는 두려움이 들었지만 실제 생활해 보니 그렇게 겁나지도 않았고 ‘역시 사람 사는 곳이구나'하고 생각했다. 손 지도원은 곧 돌아가고 우리는 방 청소를 했다. 이곳에서 6개월 동안 김숙희와 함께 자취를 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의 편의 시설 리용 방법을 배우고 익혔다. 식료품 등 생활 필수품을 구입하는 방법이라든가 은행에서 환전하는 방법, 택시와 대중교통수단을 리용하는 방법, 수영장, 미용실, 상점, 심지어 식당 리용 방법까지 무엇이든 배웠다. 보는 것마다 생소하고 보는 것마다 신기해서 배우는 재미도 있었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의 생활을 직접 경험하는 것이었다. 월마다 전기세, 수도세 청구장이 어김없이 오는 거라든가 매일 비닐봉지에 넣은 휴지를 수거해 가거나, 전화 한 통에 가스가 배달되는 등 자본주의 사회의 생활을 처음 해봤다. 참 편리하기는 하나 돈이 너무 많이 나가는 것 같아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홍시까이 시장이나 앵시가이 시장, 싼마루 거리 상점가, 까발로 거리 상점가 등 번화가를 돌아다니며 자본주의 사회의 생활풍토와 도시 생활의 질서를 료해했다. 김승일, 장 지도원과 며칠간 마카오에 머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그들 뒷전에 따라만 다니느라고 직접 자본주의 사회의 분위기를 느껴 볼 틈이 없었다. 숙희와 나는 생활비를 쪼개어 장을 보는 등 실제로 생활 속에 뛰어들어 산 경험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언어 학습과 마찬가지로 생활에 직접 부딪혀 보는 것만큼 확실한 생활 학습을 없을 것 같았다. 마카오에서도 광주에서처럼 매월 10일과 11일 자정과 25, 26일 자정에, 조선 중앙방송에 통로를 맞추어 A-2 지령을 받아 기본 암호표에 의거해 해독했다. 또 명절마다 김일성과 김정일에게 축전을 보냈다. 마카오 생활이 광주 생활과 달랐던 것은 주변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지 않았다는 점이다. 우리 자신도 위조 일본 려권을 가지고 입국하였기 때문에 되도록 친구를 안 사귀려 하였고 그곳 사람들도 다른 사람에게 신경 쓸 여가 없이 바삐 살아갔다.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어떤 면에서는 인정이 메마르고 야박한 것이 비인간적이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신분을 위장하고 지내는 우리에게는 오히려 편한 점이기도 했다. 위축되고 항상 뒤가 켕기는 듯 불안한 생활이었지만 광동어를 집중적으로 학습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하루는 술집이나 도박장에 갔을 때 그곳에 세계 각국의 여자들이 다 있는 것을 보고 약간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저 짓을 하려고 조국을 떠나 이 먼 곳까지 왔나' 하고 동정이 갔다. 더구나 몸 팔아서 돈벌이 하는 여자들을 보면서 ‘저것은 자본주의의 희생물이다'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들이 불쌍하고 안 돼 보이기도 했다. 광주와 마카오를 체험하면서 같은 중국 사람들이 들끓는 곳이었지만 체제에 따라 사람들이 180도로 다르게 살아간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