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날채비」 Pachinko 파친코 [Book 1. 고향]
파친코. Book 1. 고향. 떠날채비.
마침내 하숙인들이 작업복을 빨아달라고 말했다. 자기들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냄새가 지독했던 것이다.
복희와 동희, 선자는 네 더미 나 되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빨랫감을 들고
해변으로 갔다.
세 사람은 긴 치마를 그러모아 올려서 묶고 물가에 웅크리고 앉아
빨래판 을 꺼내 놓았다.
얼음장 같은 차가운 물에 여자들의 작은 손이 금세 얼어붙었다.
긴 세월 일을 한 탓에 세 사람의 손은 두껍고 거칠어져 있었다.
동희가 옆에서 더러운 옷을 분류하는 동안 언니인 복희는
골이 진 나무 빨래판에 젖은 옷을 문질러댔다.
선자는 생선 피와 내장이 묻어있는 정 씨 형제의
검정색 바지와 씨름을 하고 있었다.
"결혼하이까 기분이 다르나?"
동희가 물었다. 선자가 혼인신고를 마치고 처음으로 두 자매에게 결혼 소식을
알렸을 때 그들은 하숙인들보다 더 놀랐다.
"목사님이 니를 여보라고 부르나?"
복희는 빨래를 하다가 선자의 반응을 보려고 고개를 들었다.
무례하게 굴지 말라고 동생을 꾸짖을까 했지만
선자의 대답이 궁금해서 가만히 있었다.
"아직은 안 그란다." 선자가 말했다.
결혼한 지 삼 일이 지났지만 공간이 부족한 탓에 선자는 여전히 엄마와
두 자매들이 함께 쓰는 방에서 잤다.
"내도 결혼하고 싶다." 동희가 말했다.
복희가 웃었다. "누가 우리 같은 가시나들하고 결혼한다 카대?"
"내도 이삭 목사님 같은 남자랑 결혼하고 싶데이."
동희는 눈도 깜박하지 않고 말했다.
이삭 목사님은 너무 잘생기고 멋지다 아이가.
니랑 이야기할 때 보면
니를 윽수로 자상하게 바라보드라.
바다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인데도
하숙인들이 다 목사님을 존경한다 아이가. 니 그거 알고 있었나?"
사실이었다. 보통 하숙인들은 많이 배운 상류층 사람들을 비웃었지만
이삭은 좋아했다.
선자는 그를 남편으로 생각하기가 여전히 어려웠다.
복희가 동희의 팔을 찰싹 때렸다.
"미쳤는갑다. 그런 남자는 절대 니캉 결혼 안 한다.
고 머리통에 든 멍청한 생각들은 다 끄집어 내삐리라 마."
"선자랑은 결혼했는데 와 그라노."
"선자는 니랑 다른 거 모르나. 우리는 식모 아이가." 복희가 말했다.
동희가 두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목사님은 닐 뭐라 부르노?"
"선자라고 칸다." 선자는 스스럼없이 말을 이었다.
한수를 만나기 전에는 두 자매와 자주 수다를 떨곤 했다.
"일본에 간다 카니까 흥분되나?" 복희가 물었다.
복희는 결혼생활 보다는 도시 생활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결혼생활은 끔찍한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복희의 할머니와 엄마는 결혼해서 죽을 때까지 거의 일만 했다.
엄마의 웃음 소리는 한번도 듣지 못했다.
"남자들이 그라는데 오사카가 부산이나 경성보다 더 복잡하다 그라데.
니는 어디에서 살끼고?" 복희가 물었다.
"내도 잘 모른다. 이삭 목사님 행님 집에서 살 거 같더라."
이삭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선자는 한수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가까운 곳에 있을까 생각하면서
선자는 자신이 한수에게로 달려가버릴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한수를 영영 못 보는 것보다는 그게 나을 것 같기도 했다.
복희는 선자의 얼굴을 힐끗 쳐다봤다. "떠나는 게 무섭나?"
그럴 필요 없데이. 니는 거기 가서 멋지게 살기다.
거기 가면 온 천지에 전등이 있다 카더라.
전차랑 자동차, 집 안에도 말이제.
오사카의 가게에서는 마 뭐든지 다 살 수 있다 카데.
우짜면 니가 부자가 돼서 우리를 오사카로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우리가 거기 가사 하숙집을 할 수도 있다 아이가!"
복희는 자신이 방금 한 허황된 말에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
"거기 사람들한테도 하숙집이 필요할 기다.
니 엄마는 요리를 할 수 있고, 우리는 청소랑 빨래를 할 수 있고 . . . "
"내보고 미칬다 캐놓고 지금 뭐하는 기고?"
동희가 언니의 어깨를 찰싹 때렸다.
선자는 젖은 바지가 너무 무거워서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목사 아내가 부자가 될 수 있을라나?" 선자가 물었다.
"목사님이 돈을 마이 벌어 올지도 모르제!
목사님 부모님이 부자라 카던데, 아이가? 동희가 말했다.
"그걸 우찌 아노?" 선자가 물었다. 엄마한테서 이삭의 부모님이
땅을 좀 갖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다.
하지만 많은 토지 소유자들이 새로 부과된 세금을 내기 위해서
일본인들에게 땅을 다 팔아넘기고 있었다.
"돈이 마이 생길지는 모르는 일이제.
그건 그리 중요한게 아이다."
"이삭 목사님은 좋은 옷도 입고 다니고, 공부도 많이 한 사람 아니가."
동희는 사람들이 어떻게 돈을 버는지 잘 몰랐다.
선자는 또 다른 바지를 빨기 시작했다.
동희는 언니를 힐끔 쳐다보았다.
"지금 주까?" 복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복희는 선자가 고향을 떠난다는 생각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기를 말았다.
선자는 걱정스럽고 슬픈 표정을 짓고 있어서 행복한 신부 같지 않았다.
"니는 우리한테 여동생이나 마찬가지다.
근데 영리하고 참을성이 많아서 그런가
항상 언니 같데이." 복희가 웃으며 말했다.
"니가 떠나고 나면 니 엄마한테 혼날 때 내는 누가 감싸주겠노?
친언니라 카는 사람은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을 게 뻔하고 말이다."
동희가 덧붙여 말했다. 선자는 바위 옆에서 빨고 있던 바지들을
옆으로 치웠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는 항상 동희, 복희 자매와 함께 지냈다.
두 자매와 떨어져 지내는 삶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니 한테 뭐라도 하나 주고 싶어 가지고."
동희는 붉은 비단 끈에 매달린 아카시아 나무로 조각한
오리 한 쌍 을 꺼내 들었다.
아기 손만한 것이었다. "시장에서 아제가
오리는 평생 동안 짝을 지어 산다 카데." 복희가 말했다.
"어쩌면 니가 몇 년 후에 아를 낳아 가지고 집에 와서
우리한테 소개해줄지도 모른다 아이가.
내는 아 돌보는 거 윽시로 잘한데이.
동희는 거의 내 혼자서 키웠다 아이가.
동희 저 가시나가 얼마나 장난이 심했는지 모린다."
동희가 검지로 콧구멍을 들어 돼지코 를 만들며 장난을 쳤다.
"요새 니가 좀 우울해 보이는데,
와 그런지 잘 안다." 동희가 말했다.
선물 받은 오리를 꼭 쥐고 있던 선자가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가 그리운 기다." 복희가 말했다.
복희와 동희는 아주 어렸을 때 부모를 잃었다.
복희의 널찍한 얼굴에 슬픈 미소가 서렸다.
올챙이를 닮은 그녀의 작고 자애로운 눈이
툭 불거진 광대뼈를 향해 아래로 쳐졌다.
동희가 키가 작고 약간 통통하긴 했지만, 두 자매의 얼굴은
무척이나 닮아있었다.
선자가 울기 시작하자 동희가 억센 두 팔로 선자를 끌어안았다.
"아부지, 아부지."
선자가 흐느끼며 들릴 듯 말 듯 속삭였다.
"괜찮다. 걱정 마레이." 복희가 말했다.
"니는 이제 좋은 남편을 만났다 아이가."
양진은 딸아이의 짐을 직접 쌌다.
옷은 전부 다 조심스럽게 개어서 보자기 위해 적당하게 쌓아 올렸다.
그러고는 네 모퉁이를 잡아 올려 묶어서 고리 모양 손잡이를 만들었다.
신혼부부가 떠나기 전, 며칠 동안 양진은 뭔가를 잊어버린 것 같아서
보따리 하나를 몇 번이나 풀었다 묶었다 했다.
말린 대추와 고춧가루, 고추장, 말린 큰 멸치, 발효시킨 된장 등
더 많은 음식을 이삭의 형에게 싸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이삭은 배에 짐을 많이 실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곳에서 다 살 수 있어요."
이삭이 양진의 불안한 마음을 다독여줬다.
양진과 선자, 이삭이 부산의 여객선터미널로 향하던 날 아침,
복희와 동희는 하숙집에 남았다.
선자는 두 자매와 작별 인사를 하는 게 무척이나 힘들었다.
동희는 양진도 오사카로 떠나 영도에 있는 자신들을 버릴까 봐 두려워서
하염없이 울었다.
부산의 여객 터미널은 벽돌과 목조로 급조된 건물이었다.
승객들과 그들을 배웅하러 온 가족들, 그리고 행상인들이 혼잡한 터미널에서
시끄럽게 돌아다녔다.
엄청나게 많은 승객들이 시모노세키행배를 타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배를 타기 전에 경찰과 이민 관계자에게 서류를 보여주고
허가를 받기 위해서였다.
이삭이 줄을 서 있는 동안, 여자들은 때가 되면
지체 없이 일어날 수 있게 근처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들을 태울 대형 여객선은 이미 도착해서 승객 감사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해조류 냄새가 여객선의 연료 냄새와 뒤섞였다.
선자는 아침부터 속이 메스꺼웠고 그래서인제 핼쑥하고 지쳐 보였다.
앞서 구토를 해서 배 속에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양진은 제일 작은 보따리를 가슴 가까이 끌어안았다.
언제 다시 딸을 볼 수 있을까?
선자가 떠난다고 생각하자 온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선자와 태어날 손주에게 더 잘된 일이라는 위안 따위는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왜 가야만 할까? 딸이 이렇게 떠나면 손주를 안아볼 수도 없을 것이다.
왜 같이 갈 수 없을까?
오사카에도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양진은 자신이 여기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시부모님과 남편 무덤을 돌보는 일은 그녀의 책임이었다.
양진은 훈이를 떠날 수 없었다.
게다가 오사카에 가면 어디에 머물겠는가?
선자가 약하게 신음을 내뱉으며 몸을 구부렸다.
"괜찮나?" 선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니한테 금시계가 있던데."
양진이 말했다. 선자가 두 팔로 자기 몸을 끌어안았다.
"그 사람이 준 기가?"
"네." 선자가 엄마를 보지 않고 말했다.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그런 걸 줄 수 있노?"
선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 이삭 앞에는 몇 사람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시계를 준 사람은 어디 사노?" 오사카에 살아예."
"뭐라꼬? 어디 사람이길래?"
제주 사람인데 오사카에 살아예. 지금은 어딨는지 모르고예."
"그 사람 만날 끼가?" "언지예."
"선자야, 그 남자 다시는 만나면 안된다.
그 남자는 니를 버린 사람이다. 나쁜 사람이라꼬."
"결혼도 했고예." 양진은 한숨을 쉬었다.
선자는 엄마와 이야기하는 자신이 꼭 다른 사람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 사람이 결혼했다는 거는 몰랐어예. 그 사람이 말을 안 해줬어예."
양진은 살짝 벌려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시장에서 일본 남자애들 몇 명이 저를 괴롭혔는데 그 사람이 도와줬어예.
그러면서 알게 됐어예." 마침내 선자는
한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다.
선자는 항상 그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도 없었다.
"그 사람은 저랑 아를 돌봐주겠다고 그캤지만
결혼할 수는 없다고 그라더라고예. 일본에 부인하고 딸이 셋 있다고예.
양진은 딸의 손을 잡았다. "절대 그 사람을 만나면 안 된데이. 저 남자가 . . . " 양진이 이삭을 가리켰다.
"저 남자가 니 인생을 구해줬다 아이가.
이삭 목사가 니 아이를 구한 기다. 니는 이제 이삭 목사의 가족이데이.
내는 다시는 닐 만날 수 없을 기다. 엄마가 된다는 기 어떤 긴지 아나?
니는 이제 엄마가 되는 기다. 나는 결혼해서도
니 곁을 떠나지 않는 머스마가 태어났으면 좋겠데이."
선자는 고개를 끄떡였다. "시계는 우째 할 기고?"
"오사카에 가서 팔 기라예." 양진은 그 대답에 만족했다.
"큰일이 생길지 모르니께 잘 챙기 놔레이.
이삭 목사가 어데서 났노 물으면 내한테 받았다 케라."
양진은 속주머니 안을 더듬거렸다.
"니 아버지한테서 받은 기다." 양진은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준
금반지 두 개를 선자에게 건네주었다.
꼭 팔아야 하는 일이 아이면 팔지 말거레이.
큰돈이 필요할 때를 생각해서 보관해두는 게 좋을 게다.
니는 검소하지만서도 아를 키울라 카면 돈이 필요하데이.
의사를 불러와야 할 수도 있고,
니가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아이가.
아들이 태어나면 학교에 보낼 돈이 필요하고,
남편이 돈을 못 벌어다주면 니가 버려야 할 수도 있데이.
그럴 때를 생각해서 저축을 해둬야 한다 이 말이다.
필요한 것만 사 쓰고 남는 동전은 깡통에 던져 넣어 두면
그기 있는지도 모르고 살게 된다.
여자는 항상 저축을 해야 한데이. 남편도 잘 돌봐야 하고.
안 그러면 다른 여자한테 뺏기뿐다. 시댁을 존경하고
그분들 말씀을 잘 따르그레이. 니가 잘못하면 우리 가족이 욕을 먹는다.
항상 우리를 위해 최선을 다했던 친절한 니 아버지를 생각해보거레이."
양진은 선자에게 또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떠올리려 했지만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선자는 시계와 돈을 넣어 웃옷 아래에 숨겨 놓은 천주머니를 꺼내
금반지를 같이 넣었다. "엄마, 미안해예."
"안다, 내 그 맘 다 안다." 양진이 선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니는 내가 가진 전부다. 이제 내한테는 아무것도 없데이."
"도착하면 이삭 목사님한테 편지를 보내달라고 할게예."
"그래, 필요한 기 있으면 이삭 목사 한테
조선어로 편지를 써달라고 부탁해 봐라.
그럼 내가 동네 사람한테 읽어달라고 하면 되지 않것나."
양진은 한숨을 쉬었다. "우리가 글자를 알면 얼마나 좋았을꼬."
"숫자는 알자나예, 계산도 할 수 있고예.
아버지가 가르쳐주셔자나예."
양진은 웃었다. "그래. 니 아버지가 가르쳐줬제."
"니 집은 인자 니 남편 곁이데이." 양진이 말했다.
이것은 그녀가 훈이와 결혼했을 때 아버지가 해주셨던 말이었다.
"다시는 집에 오면 안된데이."
하지만 양진은 자기 자식에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얼라하고 남편을 위해 아늑한 가정을 꾸며야 한데이.
그기 니 할 일인기다.
남편하고 자식이 고통받게 해서는 안 된데이."
이삭이 차분한 표정으로 그녀들이 있는 쪽으로 돌아왔다.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서류나 돈이 부족해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선자와 이삭은 괜찮았다.
모든 것이 만족스럽게 다 준비되어 있었다.
이삭과 그의 아내는 이제
오사카로 떠날 수 있었다.
[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