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원 초대소, 서른 번째-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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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원 초대소, 서른 번째
우리는 일본 말을 능숙하게 구사하면서 행동을 태연하게 해냈다. 아스토리아호텔 접수창구에서는 김승일이 숙박카드를 작성하는데 내가 옆에서 거들어 주었다. 우리가 투숙할 방은 3층이였다.
방에 들어서자 난생 처음 호텔 방을 리용해 봄으로 고급스런 호텔 설비에 감탄하면서도 지금까지 생각지 못했던 걱정이 생겼다. 김승일이 아무리 늙은이라고는 하지만 23살이나 먹은 처녀가 남자와 한방에서 잠을 자야 한다는 것은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아무 일 없을 사이라 해도 일단은 불편스러운 일이였다. 그렇다고 일본인 부녀로 위장한 우리가 두 방을 쓸 수 있는 처지도 아니였다. 어쩔 수 없이 한 방을 써야 했기 때문에 나는 김승일이 잠든 후에나 옷을 입은 채 잠자리에 들곤 했다. 나는 편히 잠들지 못해 부스럭 소리만 들려도 눈을 떴다.
김승일은 밖에서와는 달리 호텔 방에 들어서면 나를 철저히 사무적으로 대해 주어 다행이였다. 그도 눈치가 빠른 사람이니 나의 고민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나 역시 그 당시에는 누구 못지 않게 사상성이 투철하고 당에 대한 충성심에 불타올랐으며 혁명정신으로 무장되여 있었기 때문에 연약한 녀성으로 보일 틈을 주지 않았다. 나는 김승일의 행동이 조금이라도 유일사상체제에 어긋나거나 공작원의 3대 생활 원칙에 위반된다고 느껴지면 가차 없이 비판을 가했으며 생활 중에 나타난 김승일의 결함을 지도원이나 과장에게 서슴없이 제기해 올렸다. 여차하면 김승일 같은 늙은이 하나쯤은 언제라도 물리칠 힘이 내겐 있었다. 나는 초대소 당시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그때 나의 격술 실력은 어지간한 보통 남자는 당해 낼 수 없을 정도였다.
다음 날 아침 10시에 전날 약속한 대로 오스트리아 려행사 앞에서 장 지도원을 만나 5일 후인 8월 28일 오후 3시 쾨펜하겐행 항공권 두 장을 구입했다.
려행사 밖으로 나오자 장 지도원은, 8월 29일 아침 10시 쾨펜하겐 중앙역 근처에 있는 려행사에서 다시 만나자고 말하고는 우리와 헤여졌다.
김 선생과 나는 아스토리아호텔에서 5박 6일간 체류하면서 관광명소를 돌아다니며 기념사진도 찍고 구경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때 우리의 여유작작한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의심할 여지 없는 일본인 부녀 관광객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내심 불안했지만 자연스럽게 우리의 임무를 잘 해내고 있었다.
우리는 5박 6일간의 비엔나 체류 일정을 마치고 8월 28일 오지리 항공편으로 오지리공항을 떠났다. 처음 서보는 자본주의 국가 공항 사열대에서 혹시 우리의 위조 일본 려권이 탄로나지 않을까 겁내며 긴장을 하였다. 그러나 붉은 색 일본 려권의 겉표지는 그 위력이 대단했다. 사열대 근무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본려권의 붉은 겉표지만 보고 출입국 도장도 찍지 않은 채 그냥 무사통과 시켰다.
이때부터 우리는 자신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비엔나 공항을 떠난 지 3시간 뒤인 저녁 6시쯤 우리는 단마르크 쾨펜하겐 공항에 도착하여 공항 대기실에 있는 호텔 안내소에서 시내 중앙역 부근의 호텔을 예약할 수 있었다.
쾨펜하겐공항에서도 마찬가지로 아무런 제지 없이 입국 절차를 밟고 통과되였다. 쾨펜하겐은 가을 날씨였는데 안개비까지 내려 스산하기 짝이 없었다. 첫 자본주의 국가 려행으로 긴장한 탓인지 나는 옷이란 옷은 다 껴입어도 뼛속까지 스며드는 추위를 어쩔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침 10시에 우리는 중앙역 부근 어느 려행사에서 장 지도원과 만났다. 장 지도원은 우리보다 먼저 도착했는지 이미 우리가 홍콩까지 갈 항공편을 알아본 후였다.
나레이션 :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고백, 랑독에 박수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