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 ⎟ Book 1. 고향 ⎟ 몰래한 사랑 (part 1 of 2)
파친코. Book 1. 고향.
몰래한 사랑 (1/2).
고한수가 연락선에 태워줬을 때 선자는 그를 가까이에서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깔끔하게 빗어 넘긴 검은 머리에서 박하 향이 섞인 포마드 기름 냄새가 났다.
한수는 서른여섯 살 먹은 선자의 엄마와 나이가 같다고 했다. 두 다리는 길지 않았지만 키가 작은 것은 아니었다. 한수는 어깨가 넓고 상체가 떡 벌어진 강인하고 건장한 남자였다. 황갈색 눈썹이 살짝 찌그러져 있었고 희미한 갈색 점과 주근깨가 날카로운 광대뼈 위로 흩뿌려져 있었다. 코가 좁고 높아서 일본인 처럼 보였고 콧구멍 주변을 터진 실핏줄이 감싸고 있었다. 갈색 이라기보다는 검은색에 더 가까운 짙은 눈동자는 긴 터널처럼 빛을 빨아들였다. 선자는 한수의 시선을 받을 때마다 배 속이 불편하게 간질거리는 것만 같았다. 한수의 서양식 정장은 우아하고 잘 손질되어 있었고, 옷에서는 하숙직 사람들한테서 나는 노동자들의 냄새나 바다 냄새가 나지 않았다.
다음 날 장이 섰을 때 선자는 중매상 사무실 앞에서 사업가들 무리와 함께 서 있는 한수를 발견했다. 선자는 아무 말 않고 그와 눈이 마주칠 때까지 기다렸다. 눈이 마주치자 한수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일에 몰두했다. 선자가 장을 다 보고 연락선을 타러 가기 위해 걸어가는데 한수가 뒤따라왔다.
"시간 있어?" 한수가 물었다.
선자가 눈을 크게 떴다. 대체 무슨 말이지?
"이야기할 시간 말이야."
선자는 평생을 남자들과 부대끼며 살았다. 남자를 두려워하거나 어색하게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한수 앞에서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심지어은 한수 옆에 아무렇지 않게 서 있는 것도 힘들었다. 선자는 침을 꿀꺽 삼키고 하숙집 남자들을 대할 때처럼 이야기하기로 마음먹었다. 겁에 질린 아이가 아니라 열여섯 살이나 먹은 여자니까 말이다.
"저번에는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더."
"별일 아니었어."
"좀더 빨리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정말 감사합니더."
"너랑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여기서 말고."
"그럼 어디서예?" 선자는 왜냐고 먼저 물어볼걸, 하고 후회했다.
"너희 집 뒤쪽 해변으로 갈게. 조수가 낮아지는 쪽에 있는 커다란 검은 바위 근처로. 넌 거기에서 가끔 빨래를 하잖아." 한수는 자기가 선자의 일상에 관해서 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싶었다. "혼자 올 수 있어?"
선자는 장바구니를 내려다보았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지만 이 남자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는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내일 아침에 나올 수 있어? 이 시간쯤에?"
"모르게어예."
"오후가 더 나을까?"
"하숙하는 사람들이 일하러 나간 뒤가 좋을 것 같아예." 선자는 자신의 말끝이 흐려지는 걸 알아차렸다.
고한수는 검은 바위 옆에서 신문을 읽으면서 선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다는 평소보다 더 파랗게 보였고, 길쭉하고 가는 구름들은 기억하고 있던 것보다 더 하얬다. 그와 함께 있으니 모든 것이 더 생생하게 느껴졌다. 고한수는 미풍에 날려 팔락거리는 신문 가장자리를 꽉 움켜쥐었다. 그러다가 다가오는 선자를 발견하고는 신문을 접어서 팔 아래에 끼워 넣었다. 고한수는 선자에게 다가가지 않고 선자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선자는 큼직한 빨래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균형을 잡으며 천천히 걸어왔다.
"선생님." 선자는 두려운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며 말했다. 고개를 숙일 수가 없어서 양손으로 빨래 뭉치를 잡아 내리려고 했다. 하지만 한수가 먼저 재빠르게 손을 뻗어 선자의 머리 위에서 빨래 보따리를 들어 올렸다. 그가 빨래 보따리를 마른 바위에 올려놓았고 선자는 등을 곧게 폈다.
"감사합니더, 선생님."
"오빠라고 불러야지. 넌 오빠가 없고 난 여동생이 없으니까,
네가 내 여동생이 될 수 있는 거 아냐?"
선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기 참 좋다!"
한수는 바다 한가운데에서 낮게 일렁거리는 파도를 훑어보다 지평선을 응시했다. "제주도 만큼 아름답지는 않지만 느낌이 비슷한 곳이야. 그러고 보니 우리는 둘다 섬 출신이네. 언젠가는 너도 섬사람들이 좀 남다르다는 걸 알게 될 거야. 우리는 좀 더 자유로운 사람들이거든."
선자는 한수의 목소리가 좋았다. 남성적이면서도 슬픔이 어려 있는 목소리였다.
"넌 아마 여기서 평생을 보내겠지."
"네. 여기가 제 고향이니까예." 선자가 말했다.
"고향이라 . . . " 고한수가 생각에 잠겼다. "우리 아버지는 제주에서 귤 농장을 했어. 난 열두 살 때 아버지를 따라 오사카로 갔지. 난 제주도를 고향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엄마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돌아가셨어." 한수는 선자가 자신의 엄마를 닮았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선자의 눈과 훤한 이마가 그랬다.
"빨랫감이 엄청 많구나. 나도 아버지와 내 옷을 빨곤 했는데. 정말 지긋지긋하게 싫었지. 부자가 돼서 제일 좋은 건 빨래와 요리를 대신 해줄 사람이 있다는 거야."
선자는 걷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빨래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실 빨래는 일도 아니었다. 다림질이 훨씬 더 어려웠다.
"빨래할 때 무슨 생각해?"
한수는 선자에 관해서 알아야 할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선자의 생각을 아는 것은 또 다른 일이었다. 한수는 누군가의 생각을 알고 싶을 때 질문을 많이 던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말로 하고 나서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보다는 진실을 말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거짓말을 제대로 할 줄 아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한수는 누군가가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보다 그 사람도 다른 사람과 별 다를 게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가 더 실망스러웠다. 한수는 멍청한 여자보다는 똑똑한 여자를 좋아했고, 뒤에서 거짓말만 일삼는 게으른 여자보다는 열심히 일하는 여자를 좋아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아버지도 나도 옷이 딱 한 벌밖에 없었어. 그래서 내가 매일 빨래를 해야 했지. 밤새 옷을 말려서 입으려고 했지만, 아침에도 아직 덜 말라서 축축한 옷을 입을 수밖에 없을 때가 많았어. 열 살인가 열한 살 때는 한 가지 꾀를 냈지. 젖은 옷을 빨리 말리려고 난로 근처에 두고 저녁 식사를 준비하러 간 거야. 당시에는 보리죽도 간신히 먹는 형편이 었거든. 난 싸구려 냄비에 든 보리죽을 저어야 했어. 안 그러면 바닥에 눌러 붙은이까. 그래서 한참 보리죽을 젓고 있는데 지독한 냄새가 나는 거야. 아버지 잠바 소매가 난로에 타버려더라고. 커다란 구멍이 뚫려버렸어. 그 일로 크게 혼이 났지." 한수는 아버지한테 호되게 맞은 기억을 떠올리며 웃었다. "머리가 무슨 속 빈 박이냐! 천하에 아무 쓸모도 없는 멍청한 놈!" 한수의 아버지는 번 돈은 모조리 술을 퍼마시는 데 쓰고 가족을 제대로 부양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아무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참 대책 없는 사람이었다. 오히려 혼자 힘으로 숲에서 먹을 것을 캐거나 사냥을 하고 좀도둑질까지 하는 아들에게 모질게 굴었다.
선자는 고한수 같은 사람이 자기 빨래를 직접 한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한수의 옷은 모두 깔끔하고 아름다웠다. 선자는 한수가 지금껏 걸쳤던 각기 다른 정장들과 하얀 구두들을 이미 본 터였다. 영도에서 한수처럼 입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선자도 뭐라고 말을 해야했다. "전 빨래를 할 때 어떻게 하면 잘 빨 수 있을까 생각해예. 빨래는 제가 좋아하는 일 중에 하나라서예. 깨진 냄비는 그냥 던져서 버려야 되지만 빨래를 하면 옷이 깨끗해지잖아예."
한수가 선자에게 미소를 지었다. "난 오래전부터 너와 함께 있고 싶다고 생각했어."
선자는 또다시 왜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넌 아주 좋은 얼굴을 하고 있어." 한수가 말했다. "아주 정직해 보여."
선자는 시장의 아주머니들한테서도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선자는 한수의 말에 뭐라고 대꾸할 수가 없었다.
오늘 아침 선자는 엄마에게 고한수를 만나러 간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자신을 괴롭혔던 일본인 학생들 얘기도 하지 않았다. 노상 같이 빨래를 하던 동희에게는 그저 자기가 대신 빨래를 하겠다고만 말했다. 동희는 빨래를 안 하게 되니 뛸 듯이 좋아했다.
"좋아하는 사람 있어?" 한수가 물었다.
선자의 뺨이 붉어졌다. "아니예."
한수가 미소를 지었다. "넌 이제 열일곱이 다됐어. 난 서른네 살이라 너보다 두 배나 나이가 많아. 내가 네 오빠이자 친구가 되어주고 싶어. 한수 오빠 말이야. 어떠니?"
선자는 한수의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선자는 병에 걸린 아버지가 낫기를 바랐던 때를 제외하고 이보다 더 간절한 순간은 지금껏 없었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아버지를 생각하지 않거나 머릿속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날은 하루도 없었다.
"빨래는 언제 하러 오니?" "사흘에 한 번씩예."
"이 시간에?"
선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순간, 폐와 심장이 기대와 경이로 가득 차는 것 같았다. 선자는 항상 이 해변을 사랑했다. 끝없이 펼쳐지는 옅은 청록색의 바다, 돌이 섞인 모래와 바다 사이에 놓인 검은 바위들, 그리고 그 바위들을 둘러싼 하얀 자갈들을 사랑했다. 이 해변에 고요함은 선자에게 안전과 만족을 느끼게 했다. 이곳을 찾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곳을 예전과 똑같이 생각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한수가 선자 옆에 놓여 있던 매끄럽고 납작한 돌 하나를 집어 들었다. 회색 줄무늬가 있는 검정 돌이었다. 한수는 생선 도매용 컨테이너에 표시를 할 때 쓰는 하얀 분필을 주머니에서 꺼내어 돌바닥에 x 표시를 했다. 그러고는 쪼그리고 앉아 주변에 깔린 어마어마하게 많은 바위들을 살펴보다가 중간 크그의 바위를 찾아냈다. 벤치 높이만한 그 바위에는 물기가 없는 틈이 있었다.
"내가 여기 왔는데 너를 만나지 못하고 일하러 돌아가야 하면 이 돌을 여기 바위틈에 넣어 둘게. 그럼 내가 왔다 갔다는 뜻이야. 네가 여기 왔다가 나를 못 만나면 너도 이 돌을 같은 곳에 놓아뒀으면 좋겠어. 그러면 네가 날 보러 왔다는 걸 알 수 있으니까."
한수는 선자의 팔을 토닥여주고 선자에게 미소를 지었다.
"선자야, 난 이만 가봐야 해. 나중에 또 보자. 알겟지?"
선자는 한수가 멀리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한수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선자는 쪼그리고 앉아 빨래 보따리를 풀어서 빨래를 하려고 했다. 더러운 옷 하나를 꺼내 차가운 물에 담갔다. 모든 것이 달라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