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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 팟캐스트 (Reading Time podcast), Episode 35 - 김영하 “그림자를 판 사나이” - Part 4

Episode 35 - 김영하 “그림자를 판 사나이” - Part 4

어깨가 시려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산책로에서도 하나같이 활기찼다. 모두 뛰거나 바삐 걸으며 어디론가로 가고 있었다. 다리 밑까지만 갔다가 다시 돌아오리라. 나는 속도를 조금 높였다. 다리 밑에 다다르니 못 보던 천막이 하나 쳐져 있었다. 사오인용 주황색 천막 안에선 불빛이 흘러나왔다. 누군가가 있는 것이었다. 두런두런 말소리도 들려왔다. 밤이면 몹시 추울 텐데 용케도 여기서 버텼다 싶었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꽂고 한참이나 그 천막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부욱, 지퍼가 열리며 남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뭐야?”

남자는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당황하여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그냥 지나가다가……”

열린 틈으로 여자의 얼굴도 얼핏 비쳤다. 스물이나 되었을까. 어려 뵈는 얼굴에 약이라도 먹은 듯 눈이 풀려 있었다. 세상 어떠한 것에도 관심이 없는 눈길이었다. 추운 줄도 더운 줄도 모를 얼굴로 그녀는 잠시 나를 응시하더니 다시 고개를 안으로 쑥 집어넣었다. 자전거를 탄 어린아이들이 나와 그들 사이를 가르며 지나갔다. 그 틈을 타 나는 집 쪽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내 등에 대고 남자가 뇌까렸다.

“미친놈.”

‘여기서 한강까지 4.5km.' 개 한 마리가 표지판 밑동에 오줌을 갈기고 있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따뜻한 물을 받아 몸을 담갔다. 괜히 아침부터 욕을 얻어먹었다는 생각에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화가 났다. 나는 욕조에서 발로 물을 첨벙거리기 시작했다.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거울에도 변기에도 수납함에도 수건걸이에도 비눗물이 튀었다. 나는 손으로도 물을 튀겨올렸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 야아아아아!

욕조에서 나와 몸을 닦고 간단한 아침을 먹었다. 옷장에서 마른 수건 몇 장과 건조대에 말려둔 걸레를 집어들고 욕실에 들어가 청소를 했다. 내가 하는 일이 이렇다. 화도 제대로 못 내고 혼자 저지른 일, 아무도 모를 일이나 조용히 뒷감당을 한다. 알고 보면 다들 별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는 사람 몇이나 되냐. 그건 엄마의 말버릇이었다. 그렇지만 엄마는 대체로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았다. 남편도 셋이나 두었고, 여행이며 쇼핑이며 대체로 아무 생각 없이 저지르고 보는 스타일이었다. 이상한 것은 그렇게 살고도 별로 끝이 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엄마는 헤어진 남편들에게 언제나 당당하게 생활비나 여행비, 쇼핑 대금 대납을 요구했다.

“내가 잘 살아줘야 다들 편한 거 아냐?”

엄마가 그렇게 말하면 다들 꼼짝을 못했다. 죄의식이 없는 여자에게 남자들은 약했다. 결혼을 마치 홈쇼핑처럼 여기는 여자를 어찌 당하랴. 엄마는 결혼이라는 제도의 소비자였다. 언제나 턱을 당당하게 쳐들고 자기 권리를 요구했다. “물러줘.” “망쳐놨으니 책임져.” 엄마는 그 몇 마디로 평생을 대체로 잘 살았다. 자식에 대해서도 별다르지 않았다. 나로선 편한 면도 있었다. 이를테면 엄마는 내 결혼을 결코 재촉하지 않았다.

“너 좋을 대로 해. 결혼, 그거 남자한텐 손해야.”

내가 아파트 전셋값이라도 요구할까봐 엄마는 늘 전전긍긍했다. 내가 지금껏 결혼하지 않은 게 엄마 탓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혀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엄마는 끝없이 요구하는 빚쟁이, 입을 벌리며 달려드는 아귀라는 흥미로운 여성상을 보여주었다. 내가 소설가가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자 엄마는 자기가 아는 얼마 안 되는 영어단어를 다 동원하여 축하했다.

“브라보, 굿! 유어 마이 릴리 릴리 그레이트 썬!”

그리고 이렇게 충고해주었다.

“여자들을 위하는 문학을 하렴. 그럼 일생이 평탄할 거야. 여자는 아름답게 그려주고 남자들은 죽일 놈들로 만들어. 그럼 아무도 널 미워하지 않을 거다.”

가끔 엄마의 그 이상한 충고를 생각하면 묘한 기분에 빠져든다. 여자를 위하는 문학? 그런 게 있기는 한 걸까? 엄마, 살아 있었다면 남편을 둘은 더 갈아치웠을 엄마. 잠재적 경쟁자인 모든 여자에 대해 험담을 아끼지 않던 그녀는 미경에 대해서도 좋은 말을 하지 않았다. 대학 시절, 카페에서 우연히 마주친 엄마는, 엉덩이를 들이밀고 앉아 미경과 맥주 몇 잔을 나누어 마시다가 그녀가 화장실에 간 사이, 입이 석 자는 나와 있는 내게 짤막한 인물평을 남겼다.

“실속은 없을 상이야. 똑똑한데 남자 복이 없어. 지 속만 태우다 사십도 되기 전에 얼굴이 쭈글쭈글해질 거야. 엄마 말 틀리나 봐라.”

애인이 아니라는 말은 아예 듣지도 않고 엄마는 만나기로 한 남자들과 어울려 카페를 나갔다. 물론 맥줏값도 내지 않은 채였다. 미경 역시 엄마에 대한 우회적인 평을 날렸다. 야, 너네 엄마, 끝내준다! 근데 엄마 맞아? 무슨 엄마가 이모 같아? 나는 얼굴이 벌게져 맥주만 들이켰다. 미경과 어떻게 해볼 생각도 없었지만 막상 엄마의 말을 듣고 보니 뭔가 모욕을 받은 느낌이었다.

욕실 청소가 모두 끝났다. 나는 텔레비전 앞에 앉아 이리저리 채널을 돌려가며 시간을 보냈다. 써야 할 소설은 머릿속에서 맴돌기만 할 뿐, 구체적인 인물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밤이 되었고 다시 아침이 되었고 또 밤이 되었다. 출판사 편집부에서 전화가 두 통 왔을 뿐, 아무도 날 찾지 않았다. 나는 수화기를 들고 미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나야.”

“정말 전화했네. 안 할 줄 알았는데.”

“볼까?”

“그래.”

미경은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커피를 마시며 그녀가 새로 맡은 프로그램이며 내 소설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라디오에서 텔레비전 쪽으로 옮겼다고 했다. 교양제작국으로 소속이 바뀌어 좀 바쁘다고 했다. 오랜만에 본 그녀의 얼굴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나는 엄마의 예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서른다섯이어야 할 그녀의 얼굴은 족히 마흔다섯은 되어 보였다. 확연하게 드러나는 눈주름, 힘없이 처진 볼, 퀭하고 어두운 눈, 윤기 없이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보면 누구라도 나처럼 생각할 것이었다. 나름대로 명랑하게 떠들어대고 있었지만 연신 다리를 떨고 있는 것으로 보아 뭔가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제지했다.

“미경아.”

“이런 얘기 때문에 만나자고 한 건 아니지?”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내가 널 왜 만나자고 했을까?”

“자리를 옮길까?”

나는 그녀를 내 차에 태워 강변으로 데리고 갔다. 그녀는 더이상 내 얼굴을 마주하지 않게 된 게 편안한 모양이었다. 나는 라디오를 켰다. 진행자는 브라질 음악을 소개하고 있었다. 브라질을 흔히 삼바의 나라라고 하지요. 오늘 그 정열의 나라로 떠나볼까요?

미경이 신비한 자연현상이라도 본 것처럼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증오, 분노, 이해 불가능, 애처로움, 체념과 같은 감정들이 그녀의 눈빛에 드러났다가 빠르게 사라져갔다.

“너…… 몰라?”

“아, 몰랐구나. 그랬구나. 바보, 왜 넌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그녀는 차창에 머리를 가볍게 부딪쳤다.

“난 그런 줄도 모르고 네가 잔인하다고 생각했어. 뭐 마감? 나쁜 자식. 그게 그렇게 중요해? 이러면서 너 되게 미워하고 있었어.”

나는 라디오를 껐다. 삼바가 사라지고 적막이 찾아왔다. 데자뷰. 옛날에도 이런 순간들이 있었다. 미경은 찾아와 울고, 들어보면 바오로 얘기였다. 바오로가 찾아와 우는 때도 있었는데 들어보면 미경 얘기였다. 그들은 털어놓아야 할 뭔가가 있었다. 나는 그들이 부러웠다. 나에겐 누군가의 영혼에 어둠을 드리울 그 무언가가 없었다.

“내가 요즘 뭐 만드는지 알아?”

그녀는 핵심으로 나아가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다큐멘터리 만든다면서?”

"응." “무슨 다큐야? 날아가는 철새라도 찍는 거야?”

"아니." "그럼?" “1994년, 영광군의 어느 국도변에서 가로수를 들이받은 차가 있었어. 화재가 발생해서 운전자는 즉사했고 차는 전소됐지. 운전사는 해산물 도매업자였어.”

"그런데?" “경찰은 사고 원인을 운전 부주의로 결론짓고 사건을 종결했어. 또, 1997년 제주도 순환도로에 세워져 있던 렌터카에서 화재가 발생했어. 신혼부부였는데 남자는 차 안에서 불타 죽고 여자는 전신에 화상을 입고 도망쳐나왔는데 지금 정신병원에 있어.”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런 끔찍한 얘기는 본래 질색이었다. 미경은 창밖으로 담배연기를 훅 내뿜었다.

“참, 우리 집 고양이 돌아왔어.”

"그래?" “근데 다리를 절어. 나갔다가 어디서 떨어졌나봐. 바보 같은 녀석. 세상엔 참 알 수 없는 일들이 많아.”


Episode 35 - 김영하 “그림자를 판 사나이” - Part 4 Episode 35 - Youngha Kim "The Man Who Sold the Shadow" - Part 4

어깨가 시려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산책로에서도 하나같이 활기찼다. 모두 뛰거나 바삐 걸으며 어디론가로 가고 있었다. 다리 밑까지만 갔다가 다시 돌아오리라. 나는 속도를 조금 높였다. 다리 밑에 다다르니 못 보던 천막이 하나 쳐져 있었다. 사오인용 주황색 천막 안에선 불빛이 흘러나왔다. 누군가가 있는 것이었다. 두런두런 말소리도 들려왔다. 밤이면 몹시 추울 텐데 용케도 여기서 버텼다 싶었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꽂고 한참이나 그 천막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부욱, 지퍼가 열리며 남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뭐야?”

남자는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당황하여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그냥 지나가다가……”

열린 틈으로 여자의 얼굴도 얼핏 비쳤다. 스물이나 되었을까. 어려 뵈는 얼굴에 약이라도 먹은 듯 눈이 풀려 있었다. 세상 어떠한 것에도 관심이 없는 눈길이었다. 추운 줄도 더운 줄도 모를 얼굴로 그녀는 잠시 나를 응시하더니 다시 고개를 안으로 쑥 집어넣었다. 자전거를 탄 어린아이들이 나와 그들 사이를 가르며 지나갔다. 그 틈을 타 나는 집 쪽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내 등에 대고 남자가 뇌까렸다.

“미친놈.”

‘여기서 한강까지 4.5km.' 개 한 마리가 표지판 밑동에 오줌을 갈기고 있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따뜻한 물을 받아 몸을 담갔다. 괜히 아침부터 욕을 얻어먹었다는 생각에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화가 났다. 나는 욕조에서 발로 물을 첨벙거리기 시작했다.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거울에도 변기에도 수납함에도 수건걸이에도 비눗물이 튀었다. 나는 손으로도 물을 튀겨올렸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 야아아아아!

욕조에서 나와 몸을 닦고 간단한 아침을 먹었다. 옷장에서 마른 수건 몇 장과 건조대에 말려둔 걸레를 집어들고 욕실에 들어가 청소를 했다. 내가 하는 일이 이렇다. 화도 제대로 못 내고 혼자 저지른 일, 아무도 모를 일이나 조용히 뒷감당을 한다. 알고 보면 다들 별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는 사람 몇이나 되냐. 그건 엄마의 말버릇이었다. 그렇지만 엄마는 대체로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았다. 남편도 셋이나 두었고, 여행이며 쇼핑이며 대체로 아무 생각 없이 저지르고 보는 스타일이었다. 이상한 것은 그렇게 살고도 별로 끝이 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엄마는 헤어진 남편들에게 언제나 당당하게 생활비나 여행비, 쇼핑 대금 대납을 요구했다.

“내가 잘 살아줘야 다들 편한 거 아냐?”

엄마가 그렇게 말하면 다들 꼼짝을 못했다. 죄의식이 없는 여자에게 남자들은 약했다. 결혼을 마치 홈쇼핑처럼 여기는 여자를 어찌 당하랴. 엄마는 결혼이라는 제도의 소비자였다. 언제나 턱을 당당하게 쳐들고 자기 권리를 요구했다. “물러줘.” “망쳐놨으니 책임져.” 엄마는 그 몇 마디로 평생을 대체로 잘 살았다. 자식에 대해서도 별다르지 않았다. 나로선 편한 면도 있었다. 이를테면 엄마는 내 결혼을 결코 재촉하지 않았다.

“너 좋을 대로 해. 결혼, 그거 남자한텐 손해야.”

내가 아파트 전셋값이라도 요구할까봐 엄마는 늘 전전긍긍했다. 내가 지금껏 결혼하지 않은 게 엄마 탓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혀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엄마는 끝없이 요구하는 빚쟁이, 입을 벌리며 달려드는 아귀라는 흥미로운 여성상을 보여주었다. 내가 소설가가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자 엄마는 자기가 아는 얼마 안 되는 영어단어를 다 동원하여 축하했다.

“브라보, 굿! 유어 마이 릴리 릴리 그레이트 썬!”

그리고 이렇게 충고해주었다.

“여자들을 위하는 문학을 하렴. 그럼 일생이 평탄할 거야. 여자는 아름답게 그려주고 남자들은 죽일 놈들로 만들어. 그럼 아무도 널 미워하지 않을 거다.”

가끔 엄마의 그 이상한 충고를 생각하면 묘한 기분에 빠져든다. 여자를 위하는 문학? 그런 게 있기는 한 걸까? 엄마, 살아 있었다면 남편을 둘은 더 갈아치웠을 엄마. 잠재적 경쟁자인 모든 여자에 대해 험담을 아끼지 않던 그녀는 미경에 대해서도 좋은 말을 하지 않았다. 대학 시절, 카페에서 우연히 마주친 엄마는, 엉덩이를 들이밀고 앉아 미경과 맥주 몇 잔을 나누어 마시다가 그녀가 화장실에 간 사이, 입이 석 자는 나와 있는 내게 짤막한 인물평을 남겼다.

“실속은 없을 상이야. 똑똑한데 남자 복이 없어. 지 속만 태우다 사십도 되기 전에 얼굴이 쭈글쭈글해질 거야. 엄마 말 틀리나 봐라.”

애인이 아니라는 말은 아예 듣지도 않고 엄마는 만나기로 한 남자들과 어울려 카페를 나갔다. 물론 맥줏값도 내지 않은 채였다. 미경 역시 엄마에 대한 우회적인 평을 날렸다. 야, 너네 엄마, 끝내준다! 근데 엄마 맞아? 무슨 엄마가 이모 같아? 나는 얼굴이 벌게져 맥주만 들이켰다. 미경과 어떻게 해볼 생각도 없었지만 막상 엄마의 말을 듣고 보니 뭔가 모욕을 받은 느낌이었다.

욕실 청소가 모두 끝났다. 나는 텔레비전 앞에 앉아 이리저리 채널을 돌려가며 시간을 보냈다. 써야 할 소설은 머릿속에서 맴돌기만 할 뿐, 구체적인 인물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밤이 되었고 다시 아침이 되었고 또 밤이 되었다. 출판사 편집부에서 전화가 두 통 왔을 뿐, 아무도 날 찾지 않았다. 나는 수화기를 들고 미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나야.”

“정말 전화했네. 안 할 줄 알았는데.”

“볼까?”

“그래.”

미경은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커피를 마시며 그녀가 새로 맡은 프로그램이며 내 소설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라디오에서 텔레비전 쪽으로 옮겼다고 했다. 교양제작국으로 소속이 바뀌어 좀 바쁘다고 했다. 오랜만에 본 그녀의 얼굴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나는 엄마의 예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서른다섯이어야 할 그녀의 얼굴은 족히 마흔다섯은 되어 보였다. 확연하게 드러나는 눈주름, 힘없이 처진 볼, 퀭하고 어두운 눈, 윤기 없이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보면 누구라도 나처럼 생각할 것이었다. 나름대로 명랑하게 떠들어대고 있었지만 연신 다리를 떨고 있는 것으로 보아 뭔가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제지했다.

“미경아.”

“이런 얘기 때문에 만나자고 한 건 아니지?”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내가 널 왜 만나자고 했을까?”

“자리를 옮길까?”

나는 그녀를 내 차에 태워 강변으로 데리고 갔다. 그녀는 더이상 내 얼굴을 마주하지 않게 된 게 편안한 모양이었다. 나는 라디오를 켰다. 진행자는 브라질 음악을 소개하고 있었다. 브라질을 흔히 삼바의 나라라고 하지요. 오늘 그 정열의 나라로 떠나볼까요?

미경이 신비한 자연현상이라도 본 것처럼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증오, 분노, 이해 불가능, 애처로움, 체념과 같은 감정들이 그녀의 눈빛에 드러났다가 빠르게 사라져갔다.

“너…… 몰라?”

“아, 몰랐구나. 그랬구나. 바보, 왜 넌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그녀는 차창에 머리를 가볍게 부딪쳤다.

“난 그런 줄도 모르고 네가 잔인하다고 생각했어. 뭐 마감? 나쁜 자식. 그게 그렇게 중요해? 이러면서 너 되게 미워하고 있었어.”

나는 라디오를 껐다. 삼바가 사라지고 적막이 찾아왔다. 데자뷰. 옛날에도 이런 순간들이 있었다. 미경은 찾아와 울고, 들어보면 바오로 얘기였다. 바오로가 찾아와 우는 때도 있었는데 들어보면 미경 얘기였다. 그들은 털어놓아야 할 뭔가가 있었다. 나는 그들이 부러웠다. 나에겐 누군가의 영혼에 어둠을 드리울 그 무언가가 없었다.

“내가 요즘 뭐 만드는지 알아?”

그녀는 핵심으로 나아가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다큐멘터리 만든다면서?”

"응." “무슨 다큐야? 날아가는 철새라도 찍는 거야?”

"아니." "그럼?" “1994년, 영광군의 어느 국도변에서 가로수를 들이받은 차가 있었어. 화재가 발생해서 운전자는 즉사했고 차는 전소됐지. 운전사는 해산물 도매업자였어.”

"그런데?" “경찰은 사고 원인을 운전 부주의로 결론짓고 사건을 종결했어. 또, 1997년 제주도 순환도로에 세워져 있던 렌터카에서 화재가 발생했어. 신혼부부였는데 남자는 차 안에서 불타 죽고 여자는 전신에 화상을 입고 도망쳐나왔는데 지금 정신병원에 있어.”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런 끔찍한 얘기는 본래 질색이었다. 미경은 창밖으로 담배연기를 훅 내뿜었다.

“참, 우리 집 고양이 돌아왔어.”

"그래?" “근데 다리를 절어. 나갔다가 어디서 떨어졌나봐. 바보 같은 녀석. 세상엔 참 알 수 없는 일들이 많아.”